[현장에서] 대기업을 구멍가게로 만든 대통령

영화 ‘이끼’에 나오는 천용덕 이장은 곧 마을의 대통령이다. 그의 말한마디에 사람을 쓰는 일, 물건을 사고 파는 일, 각종 민원 등 모든 것이 좌우된다. ‘이장님 말씀’을 거부하면 후환이 두려워 마을 사람들이 천 이장에 거역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엔 법도 시스템도 없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의 통치는 끝내 검찰에 적발돼 각종 비리를 쏟아내며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온나라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 그 어떤 상식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끼의 마을이 떠오른다. 천 이장이 수족처럼 여겼던 김덕천에 발목이 잡힌 것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피의자로 몰리기까지 그의 ‘행동대장’이었던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진술이 결정적이었단 점도 흡사하다.

하지만 더욱 판박이인 것은 팔이 비틀려 미르ㆍK스포츠재단에 거액을 낸 대기업들이 천 이장의 요구가 부당한 것인지 알면서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마을 주민들과 같다는 점이다.

심지어 박 대통령은 각 대기업들에 각기 다른 민원을 들이밀며 압박했다. 인사청탁부터 납품계약까지 각각의 대기업들에 얽힌 박 대통령 개입 정황을 보면 매우 구체적이다.

박 대통령이 최측근 최순실 씨와 친분이 있는 학부모(정유라 초등학교 동창 아버지) 민원까지 챙겼다는 점에선 국민적 허탈함이 배가 됐다. 그것도 한 나라의 대통령과 재벌총수가 이런 얘기를 하려고 만났다니 분노는 더욱 타오를 수밖에 없다.

대기업들은 정권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박 대통령 요구를 들어줬다고 했다. 숱한 엘리트들이 뭉쳐 있고, 철옹성 같은 매뉴얼과 촘촘한 시스템으로 점철된 대기업들이 박 대통령 한마디에 무너졌다.

이쯤 되면 박 대통령은 세계적인 대기업들을 이끼 마을에나 있을 법한 구멍가게로 전락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 한마디에 대기업들은 사람을 쓰고 기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매뉴얼과 시스템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모든 역대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박 대통령도 취임 당시 경제성장과 일자리창출이란 과제를 기업들과 함께 풀겠다 했다. 규제혁파도 거기서 나왔다.

허나 장막 뒤에선 박 대통령이 대기업들을 정권에 붙어야 사는 ‘이끼’처럼 다뤘다. 그 결과 박 대통령은 천 이장처럼 초라한 결말을 앞두게 됐다. killp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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