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일간의 세계여행] 135. 이슬람ㆍ로마유적에 환상의 해변까지…이방인이 반한 말라가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나를 여행체질이라고들 하지만 여행에 특화된 체질 같은 것은 없다. 여행이 좋으니까 즐거움은 부각시키고 부수적인 불편함은 언급하지 않을 뿐이다. 잠귀가 밝고 예민한 편인 나는 어디에서 자도 잠자리가 편하지는 않다. 여기 버지니아의 아파트는 관광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나 호텔이 아닌데다가 위치도 센트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그저 일반인들이 사는 주택이다. 친구의 아파트에 혼자 묵는 것이라 마음도 편안히 정돈된다. 덕분에 어젯밤에는 이 여행 나오고 처음으로 내 집처럼 편히 잤다.

아침식사는 빵과 하몽에 쥬스 한 잔이다. 작은 냉장고를 열 때마다 감사한 마음이 뭉클하다. 아무리 딸의 부탁이라 해도 낯선 여행자를 위해 장을 보고 냉장고를 채우고 집을 정리했을 후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는다. 오전 10시에 버지니아의 아버지 후안이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 세비야(Sevilla)로 들어와서 부활절 축제를 즐기고 바로 모로코로 입국해서 2주를 보냈다. 그 사이 4월이 다 지나갔다. 오월의 태양이 빛나는 시기에 타리파(Tarifa)를 거쳐 원래는 론다(Ronda)와 그라나다(Granada)를 들르려는 일정이었지만 어찌하다 보니 계획에 없는 이곳 말라가(Malaga)로 오게 되었다. 오늘은 시외버스를 타고 그라나다로 가서 알함브라궁전을 보고 싶었지만 후안과의 약속 때문에 포기했다. 알함브라궁전보다 후안과의 약속이 더 중요하다. 여행일정도 많이 저물어 이제 돌아갈 날짜가 2주정도 남았다. 일정이 자꾸 늘어나서 가보고 싶었던 크로아티아는 다음 여행을 기약하기로 한다. 여행의 유효기간이 끝나가고 있다. 포기하거나 계획을 재정비하는 속도도 빨라진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다보니 감동이 덜해지고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마음도 편해진다.

​오전 10시가 넘자 초인종이 울린다. 항상 유쾌하고 장난기 넘치던 버지니아가 말하길, 자신보다 더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버지니아의 아버지 후안이다. 안달루시아 사람답게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후안은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며 들어온다. 자신의 아버지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해도 아마 한 시간이상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웃어대던 버지니아의 얼굴이 떠오른다. 후안은 스페인어만 할 줄 알고 나는 생존 스페인어만 하는 사람이니 처음에는 어색하다. 하지만 버지니아의 말대로 후안은 유쾌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다. 말로 안되는 이야기는 다 바디랭귀지로 물어보신다.


이곳에 머무르는 게 불편하지는 않은지, 문을 잘 잠그고 잤는지, 베란다에는 나가봤는지, 냉장고의 음식은 먹어보았는지 세세한 것까지 손짓을 섞어 물어보고 나의 더듬거리는 대답도 귀 기울여 듣는다. 첫날 왔을 때 버지니아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데리고 들어가서는 버지니아가 인형을 데리고 잔다며 흉도 보시고 흰 천에 싸여있던 낡은 재봉틀도 보여주신다. 버지니아의 할머니가 쓰던 것을 물려주셨다며 사진을 찍으라고 재촉도 하신다. 가만 보니 옛날 시골에 가면 우리 할머니 댁에 있던 재봉틀과 비슷한 발재봉틀이다. 워낙 재미있는 분이라 말할 때마다 웃게 된다. 엔지니어인 후안은 손재주가 많은지 딸의 아파트의 실내 인테리어도 직접 해 줬다며 데리고 다니면서 보여 주신다.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아예 내 수첩을 꺼내 필담을 시작한다. 어제 말라가의 어디어디를 다녀왔는지 체크도 하신다. 말라가의 인구가 50만 정도라며 유럽사람들이 많이 찾는 말라가 자랑도 엄청 하신다. 서울인구는 천만이라고 숫자를 쓰니까 놀라는 표정은 더 재미있다. 내일 말라가 공항으로 가는 방법을 물으니 버스번호와 지하철 갈아타는 법까지 세세히 알려주신다. 내 여행의 여정들을 묻고 놀라기도 하고 버지니아에게서도 듣지 못한 가족이야기도 술술 나온다. 내가 도착한 날 집에 안 계셔서 나를 당황하게 했던 조부모님은 그날 마침 점심 약속이 생겨서 잠깐 외출하셨던 거라고 한다.

자상하고 유쾌한 후안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나누다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많은 이야기와 웃음 끝에 이제는 후안이 삼촌 같이 생각되고 그의 콧수염도 친근해 보인다. 오늘의 방문은 내가 내일 아침 일찍 말라가를 떠날 거라서 아파트 열쇠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하기 위한 이유도 있다. 열쇠는 약속한 장소에 잘 숨겨두고 가기로 한다.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행운을 빌어주며 후안이 떠난다. 알함브라궁전과 맞바꾼 후안과의 시간이 절대 아깝지 않다.


배낭에 넣어 다니던 운동화를 꺼내서 깨끗이 빨아 베란다에 널고 다른 빨래도 건조대에 널어놓고 열쇠꾸러미를 들고 집을 나선다. 한국에서 자취하는 사람의 포스다. 몇 번을 타고 다닌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간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 강을 끼고 한참을 달리면 센트로 근처가 나온다. 센트로로 바로 가는 버스는 아니라서 다리를 건너 조금만 걸으면 된다.

​말라가의 중앙시장 정도 되는 메르카도(Mercado de Atarazanas)를 찾았건만 오늘이 토요일이라서인지 문을 열지 않았다. 아니면 너무 늦게 나와서 문이 벌써 닫힌 건지도 모르겠다. 유리와 대리석으로 모자이크 되어있는 건물과 둥근 무어식의 외벽이 특이하다. 시장에 들어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입맛만 다시며 지나간다.


센트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항구다. 항구로 가는 길로 접어들자 화들짝 놀라게 된다. 마이애미 해변을 연상시키는 야자수와 높은 건물들이 보인다. 여태 보지 못한 색다른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고층 건물의 레스토랑이나 매장이 있는 도로 건너편에는 요트나 유람선이 바로 정박되어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아이들이 예쁘다. 이런 모습은 세비야의 에스파냐 광장에서도 이미 봤었다. 아이들에게 드레스를 차려 입히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이 스페인의 새로운 유행인지 전통인건지 모르겠다.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이라 바라보는 마음이 더 흐뭇해진다. 


말라가의 해변은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 : 태양의 바닷가)”이라는 스페인 남부 지역의 명소 중 하나다. 따뜻한 기후와 바다가 북유럽의 추위에 지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고 한다.

멋진 카테드랄과 이슬람, 로마유적과 마이애미를 연상시키는 해변이 있는 말라가는 과연 북유럽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곳이다. 타리파에서도 이미 보고 왔지만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해변이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변에 앉는다. 지중해는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 것이다. 시끌벅적한 사람들 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어색해하지 않고 즐기게 된 나에게, 이 바다는 누군가와 함께라면 더 즐거울 수 있겠구나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마리아가 가보라고 적어준 등대까지 들러 오늘의 미션을 완료한다. 아무런 정보나 사전 지식도 없이 도착하게 된 말라가에서는 버지니아와 마리아의 손 글씨 수첩 가이드가 톡톡히 제 몫을 한다. 


다시 해지는 센트로로 돌아온다. 토요일 오후의 거리에는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도 많아 삼삼오오 맥주에 타파스를 먹고 있다. 나는 내일 떠나는데 버지니아는 내일 모레 말라가로 돌아왔다가 며칠 쉬고 근무지인 독일로 돌아간다고 한다. 여행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자신의 비어있는 아파트를 제공해 준 친구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 싶어 기념품 가게를 들락거린다.

어디서 축제라도 있었던 것인지 옷을 맞춰 입은 악단(?)이 모여 신나게 연주를 하고 거리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관광도시 말라가의 풍경은 항상 이런 모습일 것 같다.

기념품점에서 예쁜 선물용 머그컵 두 개를 사가지고 나온다. 말라가 토박이인 버지니아와 마리아가 결코 제 돈 주고 사지는 않았을 관광객용의 머그컵이다. 작은 선물이라도 놓아두고 떠나야 마음이 좋을 것 같다. 카테드랄 뒤편 거리에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바와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할 무렵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센트로의 수퍼메르까도에서 일본라멘을 사가지고 집으로 들어온다. 토요일 저녁, 볶음우동을 만들고 스프를 끓여서 먹는 맛이 일품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청소를 한 후, 식탁 위에 센트로에서 산 선물을 올려놓고 잊지 못할 이름들, 버지니아와 마리아에게 엽서를 적어서 그 앞에 둔다. 아버지 후안에게는 최대한 스페인어를 사용해서 감사의 인사를 적는다. 한국 오면 잘해준다고, 나중에 산티아고 길 함께 걷자고 웃던 모로코에서의 시간들은 아득해지지만 그때의 말들이 실현된다면 정말 좋겠다. ​론다(Ronda)도 그라나다(Granada)도 못가고 말라가에서만 3박4일을 머물다 떠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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