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석의 영화X정치]존 레논, 닉슨, 그리고 200만의 촛불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1969년 11월 15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50만명이 집결했다. 베트남전 중 반대 시위였다. 미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 시위였고, 마지막까지 시위자들은 평화를 유지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군중들에 대해 “젊은이들이 압도적이었다”며 ”평범한 미국민들이 대부분이었고 급진 좌파와 구식 자유주의자들, 공산주의자와 평화주의자, 그리고 한 줌도 안 되는 극렬 신좌파가 이따금 눈에 띄었을 뿐”이라고 보도했다. 또 영국 신문 타임스는 “이날의 결정적인 이벤트는 위대하고 평화로운 군중들의 시가 행진이었다”고 보도했다. 


▶47년전 타오른 200만개의 촛불

워싱턴 D.C에서 열린 집회의 앞에는 피터 폴 앤 메리, 아를로 거스리, 피트 시거 등의 당대의 유명 포크 뮤지션들이 있었다. 이들과 군중들은 하나가 돼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존 레논의 ‘기브 피스 어 챈스’(Give peace a chance)였다. 당시 시위 참여자들의 후일 증언에 따르면 ‘기브 피스 어 챈스’는 반전의 ‘애국가‘였으며 ‘브이(V)’자 모양의 손가락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촛불을 든 채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밤거리를 행진하는 것은 당시 반전 운동의 상징이었다. 워싱턴에 모인 시위자들은 노래를 부르며 “듣고 있나 닉슨? 듣고 있나 국방부?”라고 외쳤다.
이날 시위는 전국에서 열렸으며 말하자면 ‘베트남전 종전을 위한 제2차 민중총궐기의 날’이었다. 제 1차 집회는 꼭 한달전인 같은 해 10월 15일 열렸다. 영국 방송 BBC에 따르면 이 때의 시위 규모 역시 그때까지로는 사상 최대였다. 미국 전역에 걸쳐 학생, 노동자, 여성, 청년, 노인 뿐 아니라 초중등 학교의 어린 학생들까지 참여했다. 이들은 거리 시위뿐 아니라 종교 집회, 세미나, 회의 등 모든 곳에서 베트남전의 즉각적인 중단과 평화를 외쳤다.
이날 전국적으로는 200만명 이상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 추산됐다. 역시 워싱턴 D.C에서의 집회가 가장 컸다. 25만명이 모였다. 일부는 전날밤부터 모여 촛불을 들었다. 이들도 역시 존 레논의 노래를 불렀다. 


▶존 레넌, ‘Give peace a chance’

약 50년전의 촛불, 폭력과 전쟁의 밤을 이기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타올랐던 촛불은 다큐멘터리 ‘존 레논 컨피덴셜’에도 담겼다. 지난 2006년작으로 한국에서는 2008년 개봉했던 이 작품의 원제는 ‘미국 vs 존 레논’(The U.S. Vs. John Lennon)이다. 이 작품이 기록한 장면 중에는 존 레논과 그의 부인 오노 요코가 토크쇼에 나와 얘기하는 대목이 있다. 당시 시위를 두고 존 레논 부부는 미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쟁은 끝납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평화.” (War is over, if you want it, peace!”
존 레논은 워싱턴에서 이뤄진 1, 2차 대규모 시위를 포함한 반전 운동을 잘 알고 있었다. 그해 12월 존 레논은 기자회견을 열고 뉴욕, 런던, 몬트리얼, 파리, 로마 등 세계의 11개 주요 도시에 “전쟁은 끝났다(War is over)라는 옥외 광고판을 설치하는 캠페인을 한다고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선 “돈은 어디서 났느냐”는 질문도 나왔다. 존 레논은 자기 돈도 썼고, 각 도시 사무실에서도 도움을 줬고, 지인들도 지원했다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을 시작한 존슨 정부나 이를 이어받아 계속한 닉슨 정부는 미국 내 반전 운동에 공산주의세력의 자금이 흘러들었다고 의심했다. 존 레논은 “어떤 이들은 광고 비용이 얼마나 되냐고 묻는다, 그러나 (전쟁으로 희생되는) 목숨값보다 비싼 것은 아니다”라고 해 기자들을 머쓱하게 했다.


▶닉슨 vs 존 레논

언론은 존 레논을 강박적으로 뒤쫓았지만, 그를 이해하진 못했다고 당시의 반전 운동가는 말한다. 그러나 존 레논은이를 이용했다. 영화가 담은 기록 필름에는 당시 존 레논-오노 요코 부부가 뉴욕타임스의 기자와 설전에 가까운 인터뷰를 하는 장면도 담겨 있다. 존 레논이 반전운동을 비롯한 일련의 행위들로 인해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노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한다. 존 레논은 “‘하드 데이 나이트(A hard day’s night, 비틀스 초창기 시절의 히트곡)를 좋아하지요? 그러나 나는 지금 성장했어요” “내가 괴짜라서 다들 좋아하는 것이겠지요”라면서 “내가 신문 1면에 나간다면 반드시 ‘평화’라는 말과 함께 나갈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그런 당신의 행위들이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느냐고 하자, 존은 자신의 노래가 힘차게 울려퍼진 워싱턴에서의 시위로 대답한다. 존 레논은 “나도 함께 따라 불렀다”고 했다.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친 미국에서의 대규모 반전 시위 이후 1969년 크리스마스를 맞은 미국과 유럽 주요 도시의 길거리는 ‘War is over’라는 포스터로 장식됐다. 1971년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Happy Xmas(War is over)’라는 싱글 앨범을 내놓는다. 지금은 크리스마스 캐롤이 된 노래다.
닉슨 정부는 대규모 반전 시위와 이를 북돋우는 존 레논을 심각한 위협으로 생각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존 레논 콘피덴셜’은 닉슨 정부와 존 레논간의 대결을 그렸다. 닉슨 정부 하 FBI는 거의 내놓고 하다 시피 존 레논을 도청하고 미행하고 위협했다. 미국에서 추방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존 레논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반전 광고 뿐 아니라 오노 요코와의 2주간 침대를 공개한 ‘베드-인(Bed-In)시위’는 행위예술을 겸한 반전 시위이기도 했고, 닉슨 정부의 끈질긴 위협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베드 인은 암스테르담과 몬트리얼에서 진행됐다.
반전 운동은 계속됐고, 닉슨 정부는 결국 1973년 베트남전을 끝냈다. 이듬해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처했다가 결국 사임한다. 


▶촛불, 전쟁을 끝내고 닉슨을 끌어내리다

닉슨을 하야로 몰고간 워터게이트 사건은 여러모로 최순실 게이트의 전개과정과 닮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점점 파국상황으로 몰리는 과정도 유사하다. 닉슨 역시 탄핵이냐 하야냐의 양자택일의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다. 닉슨은 민주당 건물 도청 뿐 아니라 자신의 거액 탈세와 불법 정치자금 등 비리가 잇따라 드러나자 결국 사임한다. 후임인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닉슨을 모든 혐의에서 사면한다. 탄핵으로 물러났다면 아마도 사면은 힘들었을 것이다.
‘존 레논 컨피덴셜’은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의 전개 과정만 박근혜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와 닮았던 것이 아니라 닉슨 정부 당시의 국민들의 반대 운동 또한 유사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촛불 시위의 오랜 기원을 말해준다. 종교적 추모의 의미로 쓰이는 촛불이 언제부터 저항 운동의 상징이 됐는지 말이다. 그 기원이 정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1969년 이전이라는 사실 말이다.
‘존 레논 컨피덴셜’은 존 레논과 닉슨 정부와의 불화를 한편으로 행동하는 평화주의자, 참여하는 예술가로서의 존 레논의 면모를 그려냈다. 비틀스가 세계 대중문화에 일으킨 ‘음악의 혁명’ 이후 존 레논의 삶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평생의 연인이자 부인인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를 만난 존 레논은 비틀스가 가져왔던 ‘음악의 혁명’에 그치지 않고 ‘혁명의 음악’으로 자신의 세계를 진전시켰다. 급진주의 인권, 민권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스스로 반전평화운동 최전선에 섰으며 보수주의 권력의 타깃이 됐다. 오노 요코뿐 아니라 존 레논의 생전 비서와 사진작가, 사회운동가를 비롯해서 놈 촘스키 같은 사회.정치학자, 언론인, 비밀리에 그를 감시했던 FBI 관료 등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행동하는 예술가로서의존 레논을 담아낸다. 40여곡에 달하는 존 레논의 노래도 나온다.
그가 만약 살아 있어 100만, 200만명이 모이는 한국의 평화 촛불집회를 봤다면 어떤 노래를 헌정했을까.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런 노래이지 않았을까.

‘Happy Xmas(Park is 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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