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질 일 안한다…공직 ‘변양호신드롬’

일해도 표시안나 의욕상실
안해도 그만…시스템 붕괴
대통령·靑 부정당하는 상황
밤새 정책 만들면 뭐하나

“각종 지시를 해오던 안종범 수석이 수갑을 차고 죄수복을 입은 모습을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껴요. 사무관이나 서기관 때야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이 강하지만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정권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에요. 다음 자리를 고민해야 하는 고위공무원 입장에서 윗선 지시를 거부하기도 어렵죠.”(세종청사 실장급 공무원)

“엘리트 선배들이 최순실 게이트로 검찰 수사를 받는 걸 보면 참담합니다. 대통령이 국정농단의 공범이라면 우리가 밤새워 만든 정책들도 부정될 수밖에 없잖아요. 시스템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죠. 진짜 이럴려고 공직자가 됐는지…”(과장급 공무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한국사회가 패닉(공황)상태에 빠진지 1개월을 넘고 검찰 수사가 박근혜 정부의 각종 정책으로 확대되면서 공직사회가 속으로부터 허물어져 내리고 있다. 창조경제를 비롯한 현정부의 정책 전반에 최순실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속속 드러나면서 자신이 사명감을 갖고 수행한 업무까지 ‘검은 커넥션’에 연루됐을지 모른다는 정체성의 위기에 심각하게 빠져들고 있다. ▶관련기사 8면

급기야 무기력과 자괴감, 복지부동이 팽배해지면서 책임질 일에는 아예 손을 대지 않으려는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최근 나타나는 복지부동은 과거 복지부동과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일을 해도 표시도 안나 일할 의욕이 없고, 게다가 알아주는 이들도 없는데다 해봐야 책임만 커지고, 안해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관리체계 붕괴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공직자들 심리에 이미 현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심리, 정치적 과도기라는 확신이 고착화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현상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청와대의 국정 콘트롤 능력이 이미 상실된 상황에서 ‘식물 총리-부총리’ 체제가 1개월 가까이 되고, 현 체제도 언제 바뀔지 예측하기 어려워 해야 할 업무만 형식적으로 처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야’든 ‘탄핵’이든, 어떤 형태로든 권력 체제의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새로운 정책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존에 수립했던 정책도 만지작거리기만 할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한 국장급 공무원은 “공무원이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구현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며 “상부 지시를 따르는 과정에서 사리사욕을 챙겼다면 법적으로 처리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까지 단죄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복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전면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공무원의 자존감 상실은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일부 하위직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국가시스템 붕괴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한 경제부처의 5년차 사무관은 “장ㆍ차관들도 다 한통속이었던 것 아니냐는 의구심까지 든다”며 “이럴려고 고시합격하려고 대학 내내 공부했는지 자괴감을 든다”고 말했다.

공직사회의 붕괴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가 본격화하면서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식물정부 현상이 더 심화되지 않도록 책임총리나 최소한 경제부총리라도 신속히 교체하고, 공직자들도 책임감과 사명감을 되찾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해준ㆍ배문숙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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