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총수 10시부터 무한 대기…죄인다루듯 ‘어글리 청문회’

슈퍼국조 D-5…긴장하는 재계

세계적 기업인 이미지 타격우려
정치, 해외사업 발목 잡을까 걱정

美, CEO 청문회증언 최대한 자제
증언순서·일시·장소 정확히 공지

# 백발이 무성한 재계 총수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국회 청문회장에 나란히 앉아 있는 가운데 의기양양한 한 국회의원이 이들을 향해 쏘아붙이듯 크게 외친다.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한 거 잖아요”, “국민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됐습니다. 듣고만 계세요”

훈계하는 듯한 말투와 호통치기. 누가봐도 국민 앞에서 망신을 주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여기다 ‘듣자’고 부른 자리에서 증인의 답변은 듣지도 않고 의원은 자기주장만 늘어놓는다.

재계가 상상하는 최악의 국정조사 청문회장 모습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의혹이 사실인양 각색되어 이를 문제삼고, 비난하는 식의 청문회장이 돼선 안 된다. 생각만해도 끔찍하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9개 그룹 총수들이 증인으로 참석하는 국정조사 청문회가 오는 6일로 다가오면서 재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근거없는 추측과 호통치기, 망신주기 일색의 국정조사가 재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증인의 답변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훈계만 하는 의원은 재계의 경계대상 1호다. ▶관련기사 3면

실제로 지난 10월 국정감사 때도 이러한 장면이 목격됐다. ‘한진해운 사태‘ 와 관련해 국감장 증인으로 나왔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오너의 책임이 크다‘는 질책만 들어야 했다. 마땅히 답할 질의가 없었던 데다 답변 기회도 얻지 못한 때문이다.

사실, 이런 게 모두 인기영합주의와 맞물려 있다. 일부 의원들은 전국에 생중계되는 국정조사 청문회를 자신을 알리는 도구로 삼길 원한다. 그래서 국민에게 어필할 수 있는 좀 더 자극적인 말과 행동을 찾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재계는 이런 이유로 국회가 구체적인 혐의도 없는 그룹 총수들을 한꺼번에 TV로 생중계되는 청문회장에 세운 것에 섭섭함을 드러낸다.

재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증인으로 출석하는 회장들은 하나같이 세계적으로 이름이 잘 알려진 기업 오너들”이라면서 “청문회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을 경우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관계자는 “기업이 정부와 마찰을 빚고 있다거나 범죄혐의를 받고 있는 경우 당해 기업은 대외 신인도가 하락해 영업상 매우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며 “검찰 소환이라든가, 청문회 증인 채택에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례가 있다. 지난 1992년 현대건설은 총 사업비 50억 달러에 이르던 홍콩 ‘첵랍콕 신공항 건설 프로젝트 중 하나인 칭마(靑馬)대교 건설 공사에 최저 가격으로 입찰했으나 공사를 따내지 못했다. 수주가 확정적이었지만 당시 현대그룹이 정부와 껄끄러운 관계라는 사실이 알려진 때문이다. 정치 리스크가 해외사업에 지장을 준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주요 외신도 한국 재계 총수들의 청문회 참석이 경제심리를 악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25일 인터넷판에서 “정치인들이 정몽구 현대차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포함, 재벌 총수들을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토록 하는 안에 합의했다”며 “이는 경제 심리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보도했다.

고령에다 건강도 좋지 않은 총수들이 증인으로 불려나가 장시간 대기해야 하는 것도 기업들에겐 걱정이다. 증인으로 채택된 총수 9명의 평균 나이는 66.4세이다. 이중 최고령은 정몽구 회장이다. 1938년생인 정 회장은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80세가 된다. 정 회장은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된 역대 최고령 기업인 기록을 세우게 됐다. 손경식 CJ그룹 회장의 증인 출석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시각이 많다. 손 회장은 올해 77세로 정 회장에 이어 두번째로 나이가 많다. 그는 특히 지난 7월 폐암수술을 받고 현재 치료 중이다. 재계 안팎에선 이들이 과연 청문회 자리를 장시간 지킬 수 있을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재계 관계자는 “미국 의회의 경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곤 청문회 증인으로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부르는 일이 없다. 실무 책임자급을 부르고, 정부도 장ㆍ차관이 아니라 실ㆍ국장급 중심으로 증인을 채택한다”며 “우리 국회는 이와 비교하면 배려심이 매우 적은 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미 의회 청문회가 불필요한 인사를 무더기로 출석 요구하지 않는 것도 참고할 만 하다”며 “조사목적과 범위를 명확하게 설정하고, 청문 대상 등이 포함되는 청문회계획서를 작성함으로써 증인들의 편의를 돌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증인의 사전 면담과, 증언순서, 일시, 장소 등을 명확히 사전에 공지함으로써 증인들의 불편을 덜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총수들 세워놓고 결국 이미 나왔던 뻔한 얘기들을 반복해서 물어보는 데 그칠 것”이라며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생중계를 해가며 기업들에 대해 공분을 일으키고 재계를 불구로 만들면 우리에게 대체 뭐가 도움이 되느냐”라고 비판했다.

한편 주요 그룹 총수 대부분이 증인으로 채택된 ‘슈퍼 국정조사’가 5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각 그룹들은 막바지 준비에 한창이다. ‘총수의 대기석은 어디에 마련됐는지’, ‘어느 경로를 통해 증인석으로 향하는지’, ‘총수가 변호인을 대동할 수 있는지’, ‘총수의 점심식사는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등을 묻는 질의가 부쩍 증가했다고 국감특위 관계자는 귀뜸했다. 총수가 고령인 그룹의 경우 비상시에 대비해 국회 인근에 구급차도 대기시킬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윤재섭ㆍ정태일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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