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 미야케 쇼 감독 “살아있다는 걸 느꼈으면” [인터뷰]

日 독립영화 젊은 거장 미야케 쇼 방한
슬럼프 빠진 각본가 ‘이’의 설국 여행기
여행·일상 흐려진 경계…“그게 영화의 힘”

 

미야케 쇼 감독 [엣나인필름 제공]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각본가 ‘이’(심은경 분)의 연필 끝에서 사각사각 문장들이 피어오른다. 골똘히 머리를 굴리며 한자 한자 눌러 적은 이야기는 어느 여름날로 이어진다.

달리는 차 뒷좌석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 그는 창문 너머 풍경들과 찰나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한 바닷가 마을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여자는 어머니의 고향에 잠시 왔다는 한 남자를 만난다. 시원하게 뻗은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출렁이고, 태풍을 기다리는 바다가 불안하게 일렁이는 여름의 한가운데서, 두 남녀의 짧은 만남이 강렬하게 지나간다.

‘이’는 자신이 쓴 이야기를 떠올리며 스스로 재능이 없다고 느낀다. 깊은 슬럼프에 빠진 ‘이’는 일상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난다. 그의 발걸음은 소복이 덮인 눈 사이에 빼꼼히 자리한 어느 산장에 다다른다. 홀로 산장을 지키던 주인장과 ‘이’. 불현듯 양동이를 손에 들고 칠흑 같은 밤길을 나선 두 사람의 여정이 ‘웃픈’ 소동극으로 끝이 난다.

전혀 다른 두 계절을 배경으로 한 두 개의 이야기는 ‘여행’이란 한 단어 안에서 교차한다. 마치 꿈을 꾸는 듯, 영화 ‘여행과 나날’은 뜨겁고도 차갑고, 고요하면서 요동치는 자연 속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신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새롭고도 신선한 자극들이 온갖 것에 무뎌져 버린 감각을 흔들어 깨운다. “영화 대사 중 ‘실감’이란 말이 있는데, 그게 가장 중요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의도했던 바는 이 지점이다.

[엣나인필름 제공]

 

[엣나인필름 제공]

배우 심은경 주연의 영화 ‘여행과 나날’이 오는 10일 국내 개봉한다. 베를린국제영화제 초청작인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8),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2), ‘새벽의 모든’(2024) 등을 통해 일본을 대표하는 독립영화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이다. ‘여행과 나날’은 제78회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국제 경쟁 부문 대상인 황금표범상을 받았고, 올해 새롭게 신설된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도 초청돼 한국 관객을 만났다.

지난 3일 서울 동작구 모처에서 만난 미야케 쇼 감독은 “한국에서 개봉할 때마다 한국 관객들을 만나는 것이 내게는 굉장히 자극적인 시간”이라면서 “긴장이 되지만, 동시에 관객들의 반응이 기대도 된다”며 들뜬 표정을 지었다.

‘여행과 나날’은 액자식 구성의 영화다.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海の景)’, ‘혼야라동의 벤상(ほんやら洞のべんさん)’을 각색해 엮었다. 영화는 크게 ‘이’가 쓴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가 나오는 전반부와 ‘이’가 설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후반부로 나뉜다. 미야케 감독은 “(영화에) 여름과 겨울의 두 계절이 있고 바다와 산이 있다”면서 “이들을 관객이 하나의 영화에서 맛볼 수 있으면 재미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한 영화”라고 소개했다.

주인공은 원작에서의 국적과 나이, 성별을 바꿔 각본가 ‘이’란 캐릭터로 재탄생됐다. 미야케 감독은 ‘이’ 역의 주인공 심은경과 지난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GV)를 함께한 인연이 있다. 미야케 감독은 “이 작품을 만들 때 주인공을 누구로 해야 할 지 길게 고민하다가 어느 날 번뜩이듯 심은경 배우가 떠올랐다”면서 “중요한 테마가 여행이기 때문에,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의 놀람이 잘 표현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을 심은경이 잘 표현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엣나인필름 제공]

‘여행과 나날’은 다가가기보다 바라보는 것에 가까운 영화다. 그리고 영화는 말하는 대신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쪽에 집중한다. 영화가 잔뜩 담아낸 두 계절의 자연은 주인공들을 스쳐 스크린 밖까지 다다른다. 파도 소리, 바람에 나부끼는 치마, 차갑고 시린 겨울 공기까지. 잔잔하게 흐르는 영화 앞에서 오감은 어느 때보다 분주해진다.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살아있는 것을 새롭게 느끼길 바랐다”는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자연이 전하는 무가공의 감각을 통해 ‘살아있음’을 일깨운다.

“누구나 신선하고 놀라웠던 것이 익숙함을 지나 지루해진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하는 일도 숙련되면 새로운 것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죠. ‘여행’이란 주제를 통해 관객들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했어요. 처음에 영화를 봤을 때 ‘우와’하며 탄성이 나오는 세계관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특히 신경을 쓴 것은 바람이었다. 미야케 감독은 “전작들에서 빛과 그림자를 담았다면 이번에는 바람을 찍고 싶었다”면서 “극장 안의 어둠 속에서라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외에 피부로도 느낄 수 있는 바람을 관객들에게 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있었다”고 밝혔다.

타협도, 소통도 할 수 없는 자연과의 촬영이 쉬울 리가 없었다. 바람이 불기 직전, 순간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미야케 감독은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면서 그 시간을 적절한 타이밍에 액션을 주는 것이 감독의 일이었다”라며 웃었다.

[엣나인필름 제공]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하는 영화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뒷모습으로 끝난다. 하얀 설원을 가로지르는 ‘이’의 발걸음이, 아무도 가지 않은 땅 위에 길을 남긴다. 아마도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일 터인 ‘이’의 모습은 마치 다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이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렇듯 영화는 가장 마지막 지점에서 일상과 여행의 경계를 슬며시 뭉갠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여행과 다름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마지막 신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또 여행을 떠난다’는 의도를 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편집하면서 다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죠. 그것이 영화가 주는 힘이 아닐지 생각해요. 그리고 심은경 배우가 마지막에 걷는 길도 원래 길이 아니거든요. 그가 걸어감으로써 길이라는 것이 생긴 거죠. 그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많은 이들이 영화관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오늘이다. 미야케 감독은 인터뷰 중에도 거듭 영화관의 존재가치에 대해 언급했다. 전날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도 “극장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영화도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던 그다.

[엣나인필름 제공]

“평소엔 집중력이 떨어져서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로 영상을 보지 않아요. 그런 저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곳이 어떠한 집중력을 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영화관은 더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영화관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 제 일이잖아요. 그런 작업을 하나하나 해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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