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 “고려아연 의사결정 과정 실패”…크루서블 승인 이사회 절차 도마

3일 만에 10조 투자 승인…“매우 압축된 일정”
경영권 분쟁 속 이사회 역할 ‘시험대’ 올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지난 1월 다보스포럼에서 열린 핵심광물 분야의 전략적 파트너십과 투자 세션 공식 연사로 나서 발언하고 있다. [고려아연 제공]


[헤럴드경제=박지영 기자]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가 고려아연 이사회 운영 방식에 우려를 표했다. 고려아연과 영풍·MBK파트너스가 경영권 분쟁을 이어가는 가운데 이사회 의사결정 구조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주목받는 모습이다.

11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ISS는 고려아연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된 집행임원제 도입에 찬성 의견을 내면서 배경으로 “의사결정 과정의 실패(failure of decision-making process)”를 언급했다. 특히 2025년 12월 이사회가 ‘프로젝트 크루서블(Project Crucible)’을 승인한 과정이 “매우 압축된 일정(compressed timeline) 속에서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집행임원제도란 이사회의 업무 집행(경영) 기능과 감독 기능을 분리하는 제도다. 이사회는 의사 결정과 감독에 집중하고 집행임원은 경영을 수행하는 시스템으로, 이사회가 경영과 감독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발생하는 이해충돌이나 비효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문제는 의사결정 과정에 있었다. 업계에 따르면 고려아연은 임시이사회 소집을 약 3일 전 오후 늦게 통보했다. 일부 재무 자료 역시 이사회 승인 직전에 배포됐고, 소집 일정과 정보 제공에 문제를 제기한 이사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일 출석한 15명의 이사 중 11명이 찬성표를, 4명이 반대표를 던져 안건은 통과됐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대기업 이사회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인사들도 해당 의사결정 과정에 대해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한 현직 사외이사는 “긴급한 사안이라도 이사회 소집은 통상 최소 일주일 전에는 통보되고 적어도 하루 이틀 전에는 회사 측에서 일정과 안건에 대해 사전 설명한다”며 “이사회가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면 결국 거수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투자 규모가 10조원에 달하고 경영권 분쟁까지 얽힌 사안이라면 더욱 사전에 충분한 설명이 있었어야 한다”며 “이사들에게 설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책임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전직 사외이사는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일수록 이사회에 대한 사전 정보 제공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갈등이 있는 회사일수록 사전에 충분한 설명을 해야 한다”며 “요즘은 이사의 책임이 강화돼 단순히 회사 입장만 대변하기 어렵다. 안건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ISS는 거래의 중요성에 비해 이사회가 이를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는 감독 체계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사회가 주요 경영 사안을 단순 승인하는 역할에 머물렀다는 게 골자다.

논란의 중심에는 지난해 12월 이사회 결의가 있다. 고려아연은 2025년 12월 15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미국 정부 및 기업과 합작법인(JV)을 설립해 약 10조9000억원(74억3200만달러)을 투자해 제련소를 건설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이 과정에서 제3자 유상증자를 통해 JV가 고려아연 지분 약 10%를 확보하는 구조가 포함됐다.

당시 지분 구조는 영풍·MBK 측이 약 44%, 최윤범 회장 측이 약 32%로 영풍 측이 우위였다. 유상증자가 실행될 경우 기존 주주의 지분이 희석되면서 영풍·MBK 측 지분율은 약 40% 수준으로 낮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투자 규모가 11조원에 달하는 대형 프로젝트인 데다 경영권 분쟁 구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이었다.

지난해 1월 고려아연 임시주주총회가 열린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헤럴드DB]


고려아연 사례가 한국 기업 이사회 구조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김광중 클라스한결 변호사는 “상법상 주식회사의 경영 주체는 이사회지만 한국은 다르다. 회장·사장·전무 등 미등기 임원들이 회사를 경영하고 이사회는 승인만 한다”며 “ISS의 문제 제기는 단순히 시간이 짧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사회가 실질적인 경영 주체로 기능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통과된 상법 개정 역시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확대 등을 통해 한국 기업의 거버넌스를 개선하고, 이사회의 책임성과 감독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목표다. 이사회가 회사와 주주의 이익을 독립적으로 판단하는 의사결정 기구로 작동해야 한다는 취지다.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ISS의 판단은 통제와 절차, 권한과 책임의 균형이 흔들리면 리더십에 대한 신뢰는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며 “글로벌 기관투자자 상당수가 ISS 권고를 중요한 의사결정 기준으로 삼는 만큼 반대 권고는 고려아연의 지배구조 전반에 대한 국제적 평가로 읽힌다”고 했다.

한편 지난 8일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글래스루이스(Glass Lewis)는 고려아연 주주총회 의장을 대표이사에서 이사회 의장으로 변경하는 안건에 찬성 의견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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