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도 사석에선 편하게 말했을 것 ”
사도 갇힌 뒤주앞 독백신 심혈
이제는 흔하디 흔한 수식어가 돼버린 ‘믿고 보는 배우’. 이 묵직한 타이틀을 가장 먼저 이름 앞에 단 배우는 단연 송강호(48)일 것이다. 지난 20년 간 8600만 관객을 모으며 대한민국 영화계의 흥행 보증 수표가 됐다.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 탁월한 덕일 수도 있지만, ‘송강호’ 이름 석 자에 지갑을 여는 관객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 영화산업이 연간 관객 수 2억 명, 편당 1000만 관객 시대에 이르는 길을 그도 함께 걸어온 셈이다.
2013년 한 해에만 약 3000만 관객(‘설국열차’ 935만, ‘관상’ 913만, ‘변호인’ 1137만)과 만난 송강호는, 올해도 흥행 불패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 이준익 감독과 처음 호흡을 맞춘 영화 ‘사도’는 최근 6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국내외를 불문하고 소위 ‘대박’ 흥행작들이 오락액션 장르에 치중돼 있다는 점에서( ‘킹스맨’, ‘어벤져스2’, ‘베테랑’ 등), 정통 사극을 표방한 ‘사도’의 흥행은 이례적이다. 개봉 시기가 추석 연휴를 앞둔 시점이라, 묵직한 드라마에 가족 관객들이 손을 내밀 지도 미지수였다. 우려는 기우였다. 익숙한 역사적 사건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로 재조명한 이준익 감독의 의중이 통한 것이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꾸밈없이 정직하게 역사를 직시하는 이준익 감독의 경건한 태도, 유아인을 비롯한 배우진의 진심이 담긴 연기 등을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사도’라는 작품이 외형보다는 한국영화의 질적인 성숙을 대변하는 거 같아 주연배우로서 기쁘기 그지 없어요.”
여러 차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조명된 ‘영조’는 배우로선 피하고 싶은 캐릭터였을 터. 송강호 역시 “사극을 한 번 했지만, 왕(王), 게다가 영조를 연기한다고 하니 부담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주저하는 시간은 짧았다. 그는 왕의 정형화된 목소리 톤과 어휘 등에서 벗어나, 백지 상태에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와 ‘사도’ 유아인의 연기는 익숙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전혀 새로운 캐릭터의 이야기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극 톤이 우리도 모르게 세뇌된 것은 아닐까, 꼭 저렇게 해야만 할까 생각했어요. 물론 사료를 보면 우리가 못 알아듣는 고어들이 나오긴 하죠. 사실 왕이나 귀족들도 사석에선 편하게 말하고, 욕도 하고 그러지 않았겠어요?(웃음) 그런 부분이 더 현실감이 있죠. 그래서 ‘왕의 말투’라는 것에 얽매이지 말자고 생각했고, 영조를 해석하는 데도 그 부분에 중점을 뒀어요.”
극 중 송강호의 연기가 가장 빛난 신을 꼽는다면, 사도가 갇힌 뒤주 앞에서 영조가 펼치는 독백 신이다. 송강호는 촬영을 앞두고 비 내리는 설정 때문에 걱정이 컸다고. 대사 전달은 후시녹음으로 보완한다고 해도, 수염이 물에 젖어 떨어질까봐 신경쓰다 보면 표정 연기에 집중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빗줄기를 조절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비를 담당하는 스태프들이 밤샘 실험 끝에 이슬비를 만들어냈다고. 송강호는 “덕분에 감정을 방해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일각에선 송강호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도 ‘송강호화’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는 대중들이 배우 송강호의 진가를 인정하게 만드는 지점인 동시에, 어떤 이들에겐 그의 고정된 연기 톤으로 느껴지게도 한다. 송강호는 “애초에 워낙 개성 강한 캐릭터로 데뷔해서, 20년이 지나도 그런 이미지가 연상되는 건 어쩔수 없는 것 같다. 저도 사람인데 기계처럼 파란색을 노란색으로 탁 바꿀 순 없지 않겠나”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캐릭터의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배우 자신만의 빛깔을 투영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데뷔 20주년을 맞은 송강호의 시야는 영화계 전반으로 열린 듯 보였다. 작품에 충실한 것은 기본이고, 그를 필요로 하는 영화계 곳곳으로부터 역할이 주어지기도 한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진행을 맡은 것을 비롯해, 영화계의 크고 작은 일에 뛰어다니고 목소리를 내야 할 때가 있다. 지난 해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공개 서명에 참여하기도 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20주년의 의미도 있지만, 내홍을 겪어온 영화제가 새롭게 출발하는 시점이기도 했잖아요. 한 마음으로 영화를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그마한 역할이라도 해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사회자가 제게 안 어울리는 자리임에도 하게 됐어요.(웃음) 앞으로도 영화계에서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시점이나 그런 부분이 있다면 당연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