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향적 해석이나 편협한 평가’에 대한 데스킹 과정일 뿐”(KBS 시사제작국 탐사제작부장)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해왔던 지상파 방송3사 탐사보도,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입을 닫았다. 민감한 아이템이 올라오면 눈치를 살핀다. 불방 혹은 방송지연도 불사한다. 내부에선 잡음이 많다. 최근 KBS에서도 빚어진 일이다.
지상파 3사 보도국 기자와 PD들의 반응은 각사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르다. “끊임없는 내부의 파생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의지, “할 말이 없는게 아니라 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자조, “비교우위에 있다는 것이 더 안타깝다”는 씁쓸함이 나온다.
▶ KBS, ‘불방’ 조짐만 보이면 시끌=KBS 사내 게시판은 최근 몇 주 사이 또 한 번 시끄러워졌다.
지난 9월 8일 탐사보도팀의 2부작 프로그램 ‘훈장’의 방송일자가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 올라온 이후 10월 29일까지 제작진과 사측은 팽팽히 맞서고 있다. 애초 이 프로그램은 지난 6월과 7월에 방송 예정이었으나, 11월 4일 현재 방송날짜는 결정되지 않았다.
‘훈장을 통해 본 대한민국 70년 역사’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은 1부 ‘간첩과 훈장’, 2부 ‘친일과 훈장’ 편으로 나뉘어 제작됐다. 행정자치부와 장장 3년에 걸친 정보공개청구 소송을 통해 훈ㆍ포장 명단 70여만 건을 입수해 제작된 프로그램이다. 두 편을 아우르면 이승만, 박정희 정부 시절 친일 행적자와 일제식민통치를 주도한 일본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는 민감한 내용이 고개를 든다.
KBS 탐사보도팀은 석 달 가량 ‘훈장’ 2부작의 데스킹 과정에 있으며, 총 10차례 걸쳐 회의를 진행했다. 제작진은 “두 편 모두 방송을 기약할 수 없다”고 봤다.
제작진과 KBS 새노조 측은 프로그램의 불방은 “애초 회사와 합의해 진행한 아이템이었지만 결과물이 방송되는 시점이 차기 사장 선임 시기와 맞물려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정권에 부담이 될 가능성이 있는 민간함 내용이기에 방송을 피하는 것”이라는 판단이다.
제작진에 따르면 부장 이상급 간부들은 “방송 공정성과 객관성”을 이유로 특정 단어(1편 ‘간첩과 훈장’ 중 간첩조작)와 특정 문장(2편 ‘친일과 훈장’ 중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일 수교협상과 관련해 기시 전 일본 총리에게 보낸 친서 인사말, “귀하에게 사신을 드리게 된 기회를 갖게 되어 극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의 삭제를 요구했다. 또한 ‘친일과 훈장’ 편에선 “원고의 3분의 1을 삭제”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일본인 훈장 관련 내용 전체를 삭제할 것을 요구”받았다.
김형덕 시사제작국 탐사제작부장은 그러나 사내게시판을 통해 “외교상 의례적 표현을 문제가 많은 것처럼 서술한, ‘편향적 해석이나 편협한 평가’이기에 (삭제 요구는) 데스킹 과정일 뿐”이라고 지난 10월 26일 반박했다.
프로그램의 방송일자가 미뤄지는 것을 두고 사내 안팎으로 화제가 된 것은 이 과정에서 ‘훈장’ 제작진이 타부서로 인사 조치됐고, 사측에서 공정방송위원회 개최를 거절한 것이 알려지면서다. 두 사안을 바라보는 노사 양측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제작진의 인사에 대해 사측은 “정기인사”, 제작진은 “보복성 인사”라는 입장이다. KBS 새노조는 “탐사보도팀의 경우 워낙에 제작기간이긴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정기인사가 나더라도 기존 취재물을 마무리 짓고 발령부서로 보내왔다. ‘훈장’ 제작진의 일괄 인사발령은 이례적인 경우”라고 봤다.
공정방송위원회(공방위) 개최를 거부한 것 역시 해당 기구의 역할론을 두고 입장이 엇갈렸다. 사측은 ‘공방위’는 “방송 공정성을 논의하는 협의체로 편성은 권한 밖”이라 ‘협의’의 입장, 노조는 “제작과정과 편성 권한 등에 대한 논의 역시 공방위에 포함된다”는 ‘광의’의 입장이다.
현재 이 프로그램에 방송 여부에 대해선 양쪽의 입장이 같다. 김형덕 탐사제작부장은 지난 29일 사내 게시판을 통해 “훈장 방송을 위해서도 제작진에게 조속히 제작에 임할 것”을 촉구했으며, “프로그램은 분명히 방송될 것”이라고도 약속했다. “계획된 불방 수순”이라며 사측을 공격했던 제작진과 새노조 역시 동의한다. 다만 “마땅한 대안과 이유없이 차일 피일 방송을 미루거나 내보내지 않을 경우 기자협회 차원의 대응이 있을 것이며, 공정방송위원회를 소집해 단체협약 위반으로 고소, 고발할 계획”도 나오고 있다.
KBS의 경우 이 같은 논란이 많다. 평기자와 PD들의 취재 결과물이 불방되거나, 방송이 지연될 때마다 노조와 기자협회, PD협회 등은 즉각적인 성명이 내는 것으로 해당 문제를 공론화하고, 양측은 치열하게 맞선다.
▶ MBC, 과거의 경험에서 축적된…자기검열과 외면의 일상화=또 다른 공영방송 MBC에는 최근 비슷한 사례가 없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 민주방송실천위원회 이호찬 간사에 따르면 “역사교과서 국정화 관련 보도(집필 선언 거부, 반대 집회 등)를 거의 하지 않는 사례는 있지만, 최근 특정 아이템이 불방된 사례가 확인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물론 “아예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단서를 달았다. MBC에서 불방으로 가장 큰 논란이 일었던 최근 사례는 지난 2013년 ‘시사매거진2580’의 ‘국정원에 무슨 일이’ 편이었다.
MBC와 KBS의 분위기는 또 다르다. MBC의 한 기자는 “현재 MBC의 상황이 아이템의 삭제와 검열로 분란이 일어나는 상황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간 MBC에는 부당 전보와 징계의 칼바람이 불었다. 2008년 ‘PD수첩’이 광우병 논란을 시작으로 ‘4대강, 수심 6M의 비밀’(2010) 편 등을 통해 MB 정부를 건드린 이후 시사교양국은 인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MBC를 이끌던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줄줄이 폐지됐고, 이름만 남아있는 방송에선 “권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아이템”을 모조리 들어냈다.
2010년 이후 MBC는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통해 경영진의 ‘제작진 감시’를 시작했다. 유능했던 시사교양국 PD들은 줄줄이 징계를 받았고, 비제작부서로 인사 조치됐으며, 결국 해고돼 MBC를 떠났다. 같은 일은 끈질기게 반복됐다. 지난해엔 급기야 시사교양국이 이름을 바꾼 교양제작국이 해체됐다. 공영방송 사상 초유의 사태였다.
MBC의 한 기자는 “시도를 해오다 부당전보 등의 조치를 받는 사례가 많아지다 보니 논의 자체가 실종된 측면이 크다”며 “일선 피디와 기자들은 다뤄야할 의제들을 선뜻 이야기를 하지 못 하고, 지시하는 쪽 역시 권하지 않는다. 자기검열이 일상화 돼서 프로그램 자체가 논의되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봤다.
한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연출했던 한 PD는 “검찰, 국정원, 주무부처 인사는 물론 현재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다룰 수 있는 아이템이 없다. 그럴 바에 무난한 아이템으로 프로그램을 존속시키는 쪽이 낫지 않냐”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기자는 “뉴스뿐 아니라 탐사보도, 교양 등 전체적으로 정부 비판 아이템 등은 암묵적으로 방송되기 쉽지 않다는 정서가 팽배해있다. 과거의 경험에서 축적된 결과다.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아이템 위주가 됐다”고 말했다. 도처에 널린 이슈를 외면하는 것으로 현재를 유지하고 있다.
▶ SBS, 상대적으로 자유롭지만…“기계적 균형”=민영방송 SBS 역시 특정 아이템의 불방 사례는 흔치 않다.
SBS는 두 공영방송의 탐사보도 프로그램과 보도가 무력해질 무렵 치고 나왔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사회적 공분을 불러오는 아이템을 다뤄 주목받으며, 프로그램의 파급력을 키웠다. 양대 공영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의 동반 추락이 불러온 반사이익 효과다. 메인뉴스의 경우 타사 모니터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SBS 내부에선 실제로 “타사에 비해 아이템 선정 및 검열에 거의 휘말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정치권 이슈 등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기자와 PD, 간부 사이의 간극도 존재한다.
다만 아이템을 선정한 뒤 “균형감각을 가지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는 것이 구성원들의 입장이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연출했던 한 PD는 “반정부 아이템의 경우 정부의 시각에서, 친정부 아이템의 경우 반정부의 시각에서 질문을 던진다”고 말했다. 또 다른 PD는 “SBS의 PD, 기자들의 경우 대체로 성향을 잘 드러내지 않거나 합리적인 균령감을 가지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두 가지의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른 한 방송사의 기자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기에 객관성 논란을 불러오지 않는다. 균형 잡힌 팩트의 전달”은 장점이라고 했으나 이는 “기계적인 중립”이라는 비판의 화살로 돌아온다.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는 “상업방송의 목적은 경제적 이윤을 획득한다는 데에 있다. 오너가 있는 방송사는 어느 한 쪽의 편에 서기엔 부담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기계적인 균형을 맞출 수 밖에 없는 이유다”라고 봤다.
SBS의 한 PD는 “현재 SBS의 탐사보도,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아이템이 모두 균형감을 가지고 있다고 보진 않는다. 다만 상대적인 부분에서 비교 우위에 놓일 수 있는 수준”이라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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