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 기업이 먹잇감인가요?” 토요타도 국내서 탄생했으면 속수무책 당했다 [그 회사, 한국 기업이었다면 ②]

토요타 아키오 토요타 회장. [토요타 홈페이지]

[헤럴드경제=김현일 기자] 일본 토요타자동차는 지난 2015년 7월 처음으로 종류주식을 발행해 5000억엔을 시장에서 끌어모았다. 일본에서 종류주식 발행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특히 대기업 중에선 토요타가 처음이었다.

토요타의 자금 사정이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토요타는 종류주식 발행이 헤지펀드 공격에 대한 선제적 대응 목적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경영진에 우호적인 일본인 개인 주주를 추가로 확보해 헤지펀드 공격을 방어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새로 발행한 종류주식은 ‘5년간 거래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대신 의결권 행사를 보장했다. 또한, 배당률이 매년 0.5%포인트씩 증가하도록 설계해 장기 투자자에게 큰 수익을 보장했다. 토요타 경영진은 이를 통해 5년 간 우호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2000년대 헤지펀드 공격에 日, 경영권 방어수단 마련

앞서 2000년대 중반 일본 기업들은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하는 헤지펀드들의 무차별 공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었다. 이는 일본 기업들이 누구도 적대적 M&A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심지어 세계 최대 자동차기업 토요타조차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됐다.

일본 아이치현에 위치한 토요타 본사 전경. [토요타 홈페이지]

당시 일본 정부는 법안을 재정비하며 대응에 나섰고, 그 결과 2008년 차등의결권 제도를 도입했다. 차등의결권은 ‘1주 1의결권’ 원칙의 예외를 인정해 경영권을 보유한 대주주의 주식에는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일본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는 모두 차등의결권을 도입하고 있다.

이처럼 해외 기업들은 차등의결권과 신주인수선택권제도(포이즌필) 등 외부 공격에 대비해 다양한 경영권 방어수단을 마련하고 있는 반면 국내 기업들은 방어수단이 극히 제한적이고 실효성도 미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상 경영권 방어수단이 없어 한국 기업들이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한국 기업 겨냥한 경영권 공격 급증

실제로 최근 한국 기업들을 타깃으로 한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권 공격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한국경제인협회가 2018년부터 2023년 6월까지 유가증권(코스피) 시장에 상장된 기업 중 경영권 분쟁 소송 사실(회사가 피소된 경우)을 공시한 기업을 분석한 결과, ‘펀드’로부터 경영권 분쟁 소송이 제기됐다고 공시한 기업이 지난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영권 분쟁 피소를 공시한 기업이 2023년 상반기에만 47건에 달해 2022년 한 해에 걸쳐 집계된 28건보다 1.7배 많았는데 특히 공격 주체가 펀드인 경우는 2023년 상반기에만 15건으로 나타나 2022년(5건)보다 세 배 많았다. 별다른 방어수단이 없는 한국 기업들이 경영권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셈이다.

헤지펀드를 비롯해 기관투자자·소액주주연대 등까지 합하면 행동주의 세력의 주주권 행사는 더욱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영국의 기업 지배구조 리서치 업체인 딜리전트 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행동주의 세력의 주주권 행사 타깃이 된 한국 기업은 2020년 10개에 불과했지만 2021년 27개→2022년 49개→2023년 73개 기업으로 치솟고 있다. 특히 이달 주요 기업들의 주주총회를 앞두고 행동주의 세력들의 주주제안이 더욱 거세지고 있어 경영권 방어수단이 한국 기업의 ‘아킬레스건’이라는 지적이 쏟아진다.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수단의 부재 속에 행동주의 세력의 잇단 공격으로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2022년부터 올해까지 행동주의 펀드의 주주제안을 받고 있는 한 기업 관계자는 “지분구조가 취약한 기업만 골라 분쟁을 일으키고 주가를 띄운 다음에 털고 나가는 식이 반복되는데 기업 입장에서는 이를 제어할 수단이 딱히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행동주의 펀드가 떠나고 난 이후에도 문제”라며 “경영권 분쟁 당시 기대감에 일시적으로 올랐던 주가가 분쟁이 끝나면 급격히 떨어져 아무리 실적이 좋아도 원상 복구조차 안 되고 있다”고 털어놨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 [게티이미지]
해외기업은 방어수단 1개 이상 보유

반면 글로벌 시장에서 우리 기업과 경쟁하고 있는 해외 주요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수단을 1개 이상씩 마련해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모기업 메타는 차등의결권 제도를 통해 주식을 보통주 ‘A주’와 주당 10주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B주’로 나눠 발행한다.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CEO)는 B주의 85%인 4억6800만주를 보유해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

포드의 경우 창업자 포드 가문의 지분율은 4%에 불과하지만 의결권은 40%에 달한다. 역시 차등의결권 제도 덕분이다. 이밖에 알파벳(구글), 나이키, 언더아머, 마스터카드 등도 차등의결권을 도입했다.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포드 본사. [게티이미지]

렌터카 회사로 유명한 허츠의 경우 적대적 인수를 시도하는 세력이 10%의 지분을 취득하는 순간 포이즌필을 발동한다. 포이즌필은 적대적 M&A 상황에서 공격자를 제외한 주주들에게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다. 이를 통해 적대적 인수 시도를 무산시킬 수 있어 경영권 방어수단 중 하나로 꼽힌다.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독일 등이 채택하고 있다.

1962년 상법 그대로…“국제수준에 맞게 바꿔야”

우리나라에서도 포이즌필 도입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9년 12월 법무부는 포이즌필 도입을 골자로 하는 상법 개정을 추진한 바 있다. 그러나 국회 논의과정에서 무산됐다.

한경협을 비롯해 대한상공회의소, 중견기업연합회, 상장사협의회 등 재계 단체들은 지난해 11월 재차 포이즌필 도입을 정식 건의한 바 있다. 최근에도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포이즌필을 포함할 지 여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최상목 기획재정부 부총리는 이에 대해 “여러가지 복잡한 고민이 필요하다”며 “경영권 시장 자체의 공격·방어 수단이 잘 돼 있는지에 대한 평가와 법률적으로 하기 위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밸류업 바람을 타고 오히려 경영권 분쟁을 자극하는 행동주의 세력의 활동이 늘어나고 있어 방어수단 확대 허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곽관훈 선문대 교수는 “지금 일정 지분만 있으면 주주제안을 하는데 그 제안 내용도 행동주의 펀드의 성격에 맞는지 의문이 든다. 방어수단이 아예 없으니 행동주의 펀드들이 거리낌 없이 들어오는 것”이라며 “기업들에게 방어수단을 마련해주고 만약 경영권 유지에 악용될 소지가 있다면 (방어수단의) 발동 요건을 엄격하게 두면 된다”고 말했다.

1962년 제정된 상법은 주주총회에서 감사위원 선출시 대주주 의결권을 발행주식 총수의 3%까지로 제한하는 규정을 도입해 6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포이즌필이나 차등의결권도 인정하지 않는 환경에서 다른 나라에는 없는 대주주 3% 제한 규정까지 둬 국제 흐름과 동떨어져 있다고 줄곧 비판해왔다.

한경협 측은 “일본은 2005년 ‘회사법제의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상법에서 독립된 ‘신회사법’을 제정했고 내용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대폭 수정했다”며 “우리나라 상법은 1962년 제정된 이후 급변하는 경제 환경에 기업들이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내용들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한경협은 2021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모범회사법’을 제안한 바 있다. 당시 이 작업을 주도한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한국 회사법이 세계 표준에서 벗어나 갈라파고스식으로 변했다”며 “주총 결의방식이 1960년대 수준에 머물러 있고, 3% 초과 주식에 대해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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