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중퇴후 옷가게서 심부름하며 생활
26세때 의류공장, 12년뒤 ‘자라’ 매장 개설
44년전 ‘느린패션’ 대신 ‘빠른패션’ 추구
최대 패션기업 ‘인디텍스그룹’ 으로 키워
순 자산 676억 달러 추산 세계 6위
구내식당 이용…검소한 생활로 거액기부
그래픽디자인: 박지영/geeyoung@ |
“옷 장사는 생선 장사와 같다. 유행이 지난 옷은 어제 잡은 생선처럼 신선도가 떨어진다.”
소비자의 기호를 즉시 파악해 유행에 따라 빨리 바꿔 내놓는 의류, ‘패스트패션’. 지금은 익숙하지만 당시에는 생소했던 이 개념을 무려 44년 전에 생각해낸 이가 있었다. 세계 최대 패스트패션 브랜드 ‘자라(ZARA)’의 창업자 아만시오 오르테가(83)다.
패션쇼에서 다음 시즌의 유행을 미리 제시하고 옷을 제작해 여러 유통 단계를 거쳐 소비자에게 선보이고 반응을 살피는 ‘느린 패션’ 대신 오르테가는 지금 소비자가 원하는 옷을 바로 만들어 내놓는 ‘빠른 패션’을 제공했다. 남들과는 다른 새로운 발상과 시도로 패션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꾼 것이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고 시골 마을의 작은 옷가게를 스페인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가난한 소년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로 만들었다.
패션의 ‘평등’을 꿈꾸다
“옷가게 직원으로 일하면서 부유한 여성들만 잘 차려 입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테가는 과거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위와 같이 밝혔다. 평범한 사람들도 잘 차려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이 좋으면서도 저렴한 옷을 제공하겠다는 꿈이 자라를 탄생시킨 것이다.
스페인 북부의 소도시 라코루냐에서 가난한 철도원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를 중퇴하고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는 옷가게 심부름꾼으로 일하다 의류 사업을 구상하게 됐다.
1963년 26세의 오르테가는 의류제조공장인 ‘고아 콘벡시오네스’를 설립하며 의류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12년 뒤인 1975년 라코루냐에 ‘자라’라는 이름의 의류소매점을 처음 열었다. 오늘날 세계적인 패스트패션 브랜드가 된 자라의 시작이었다.
자라는 속도와 유행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다. “당신이 좋아하는 자라 옷이 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사라. 그렇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 “유행을 만들 것이 아니라 유행을 따라 가야 한다”는 오르테가의 말은 자라의 콘셉트를 잘 보여준다.
이를 위해 그는 매장을 가장 중요시했다. 회장이지만 사무실에 앉아있기보단 각 매장을 돌아다니며 소비자를 직접 살피는 시간을 많이 보냈다.
자라는 기획부터 판매까지의 과정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켜 최신 유행에 맞는 옷을 그때그때 선보이도록 했다. 신상품 아이디어는 매장에서 본사로 실시간 보고하도록 하고, 디자인에서 제작, 진열까지 모든 과정을 불과 2주 만에 끝낸다. 일주일간 판매 추이를 지켜보고 반응이 좋지 않은 상품은 매장에서 바로 빼고, 진열을 계속하더라도 최대 4주까지만 하도록 한다. 또 상품이 출시되면 전 세계 모든 매장에 48시간 이내에 배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옷의 기획부터 디자인, 생산, 유통, 판매까지 전 과정을 맡는 ‘SPA(Specialty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방식으로 가격을 낮춘 자라는 불황이 닥친 1970년대에 젊은 층을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마케팅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별다른 광고를 하지도 않았지만 큰 성공을 거두며 패션 시장에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세계인이 찾는 ‘패스트패션’ 기업
오르테가는 1985년 ‘인디텍스(INDITEX)그룹’을 설립하며 사업을 확장한다. 자라는 1988년 포르투갈에 첫 해외 매장을 연 데 이어 1989년 미국, 1990년 프랑스, 1992년 멕시코 등으로 영토를 넓혔다.
해외 소비자들에게도 호응을 얻은 자라는 빠르게 해외 매장을 늘려갔다. 인디텍스그룹에 따르면 올해 4월 말 현재 자라는 96개국에 2356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인디텍스그룹은 1991년 처음으로 자라 외의 브랜드 ‘풀앤베어(Pull&Bear)’와 ‘마시모두띠(Massimo Dutti)’를 신설했다. 이어 1998년 ‘버쉬카(Bershka)’, 1999년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를 설립했으며 2001년에는 속옷 브랜드 ‘오이쇼(Oysho)’를 출시했다.
이밖에 2003년에 설립한 홈인테리어 브랜드 ‘자라 홈(Zara Home)’, 2008년 신설한 ‘우떼르퀘(Uterque)’ 등 인디텍스는 8개의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인디텍스는 온라인 스토어 포함 전 세계 202개국에 진출해 있으며 매장수는 총 7490개에 달한다. 직원수는 17만4386명이다.
2001년 스페인 마드리드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인디텍스는 같은해 다우존스지속가능경영지수(DJSI)에 편입되기도 했다.온라인 쇼핑의 비중이 커지고 패스트패션 브랜드도 늘어나면서 오늘날 업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 상황이다. 이에 일부 SPA 기업들은 경영 상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인디텍스는 여전히 성장하며 ‘세계 1위 패스트패션 기업’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지난해 인디텍스는 순매출 261억5000만유로(약 35조360억원), 순이익 34억4800만유로(약 4조6200억원)를 기록했다.
‘사람’에 대한 헌신
인디텍스그룹이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람’을 최우선으로 삼는 오르테가의 철학이 있었다.
오르테가는 “인디텍스그룹의 성공은 모두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는 “직원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의무다. 그들 가까이에서 지내며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누군지 파악하며 그들의 일뿐 아니라 집, 하는 일도 챙겨야 한다”면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달라.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1년 회사가 상장할 때 자신의 주식을 직원들에게 나눠주며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사람에 대한 오르테가의 관심과 헌신은 외부로도 향했다. 그는 2002년 시작한 장애인 일자리 제공 프로그램 ‘포앤프롬(for&from)’을 비롯해 사회공헌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2007년 페루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인디텍스가 피해자들을 위해 100만유로(약 13억4000만원)를 지원한 것도 유명한 사례다. 당시 오르테가의 행동에 감명받은 많은 기업들이 지원에 동참하기도 했다. 지난해 인디텍스가 사회공헌활동에 기부한 금액은 4620만유로(약 620억원)로, 이를 통해 240만명에게 혜택이 돌아갔다.
‘은둔’과 ‘겸손’의 억만장자
맨손으로 시작해 세계인이 아는 기업을 일군 오르테가. 그는 2019년 포브스 억만장자 순위에서 6위에 올랐으며 그의 순자산은 676억달러(약 90조5700억원)로 추산된다.
자수성가로 패션업계의 신화를 만들고 세계에서 손꼽는 부자가 된다면 자만에 빠질 법도 하지만 오르테가는 기본과 겸손을 잃지 않았다.
경영 일선에 있을 때 그는 ‘은둔형 최고경영자(CEO)’로 유명했다. 사교 모임도 언론 인터뷰도 거부했으며 2001년 회사 상장을 앞두고서야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할 정도였다. 2011년 스페인 국왕이 초대한 자리에도 가지 않고, 스페인 총리가 20대 대기업 총수들을 초청했을 때도 불참했다.
부를 과시하지 않는 검소한 생활도 그의 특징이다. 세계적인 패션 기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회사에 출근했으며 넥타이를 매는 것도 싫어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가 상장되던 날 스페인 최고 재벌이 됐음에도 여느 때처럼 구내식당에 가 밥을 먹었다는 일화도 있다.
2011년 회장직에서 물러날 때는 퇴임식을 거부하고 “나 혼자만이 이루어낸 일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해낸 일이다. 나는 그 중 한 명일 뿐이다”라는 겸손한 메모 한 장으로 퇴임사를 대신했다. 이듬해 그는 2000만유로(약 270억원)를 기부했다.
퇴임 후에도 그는 회사로 출근해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공장에서 직원들과 의논하는 모습도 자주 목격된 것으로 전해졌다.
억만장자가 된 후에도 대도시의 고급 주택에 살지 않고 고향인 라코루냐의 집에 거주하며 소일거리로 닭을 키우는 오르테가의 생활은 대부호보단 오히려 촌부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노력하고 헌신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일 뿐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얼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완벽하게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그의 소망이라고 한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업적을 이뤘지만 자신은 보통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는 이 겸손한 부호는 많은 평범한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김현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