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산주의 기원’ 파헤친 이정식 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별세

고 이정식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사진=출판사 일조각 공식 블로그]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이정식(李庭植)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가 17일 오전 9시께(현지시간) 미국 필라델피아 근교 시니어타운(요양원)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고인이 석좌교수를 지낸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 따르면 고인은 193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1956년 캘리포니아주립대 로스앤젤레스 캠퍼스(UCLA)를 졸업하고 1961년 UC 버클리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콜로라도대, 다트머스대를 거쳐서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 교수로 일했다.

스승인 로버트 스칼라피노(1919∼2011) UC 버클리대 교수와의 영문 공저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으로 미국 정치학계에서 명성을 떨쳤다.

한국에서는 고려대 연구교수,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를 지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기원’은 일제시대 민족주의 운동에 토대를 둔 한국 공산주의의 기원과 주도 세력을 규명하고 해방 이후까지 전개된 공산주의 운동의 약점과 한계, 한국전쟁 휴전 이후 북한 체제 수립과 김일성 주체사상 확립에 이르는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1973년 미국에서 책으로 출간돼 다음해 미국 정치학회가 주는 최고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재단상을 스칼라피노 교수와 함께 받았다. 한국에서는 ‘한국공산주의운동사’라는 이름으로 1986년 출간됐고, 2015년 개정판이 나왔다.

고인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무장 독립투쟁을 벌인 게 맞는지를 놓고 국내와 서구 학계 일각에서 ‘가짜 김일성 논쟁’이 있었던 상황에서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라고 서술해 국내외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1990년대에도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 공산주의 치하를 직접 경험한 고인은 공산주의 통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북한 정권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북한에서 태어난 고인은 만주와 중국을 오가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왔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징병을 피하려 숨어지내다 유엔군 반격으로 목숨을 건졌다.

남쪽을 택한 그는 유창한 중국어와 일어 실력을 바탕으로 미군 번역관으로 채용돼 6.25 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 심문 통역을 맡았다.

번역관으로 일하면서 영어를 배워 1954년 1월에는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한국에서는 오늘날 경희대의 전신인 신흥대 야간부를 다녔다.

한중일을 넘나드는 유창한 언어 실력은 미국에서 학자의 길을 택한 그에게 큰 자산이 됐다.

지난해 9월에는 자신의 일생을 담은 ‘이정식 자서전-만주 벌판의 소년 가장, 아이비리그 교수 되다’(2020, 일조각)를 직접 집필해 출간했다.

앞서 ‘한국민족주의의 운동사’(1989, 미래사), ‘이승만의 청년시절’(2002, 동아일보사), ‘구한말의 개혁·독립투사 서재필’(2003, 서울대출판부), ‘대한민국의 기원’(2006, 일조각), ‘여운형’(2008, 서울대출판부) 등을 저서를 출판했다. 1990년 제1회 위암학술상, 2012년 경암학술상, 2018년 인촌상을 받았다. 미국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1926∼1980) 전 중앙정보부장 관련 자료집 ‘인간 김재규’를 펴내기도 했다.

유족은 부인 우명숙씨와 사이에 2녀(영란·지나)와 사위 로버트 루소, 앤디 곽씨가 있다. 28일 오전 10시(현지시간) 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주관 장례식을 거쳐 필라델피아 인근 조지 워싱턴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은 사이버 조문소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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