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걱정 ‘소요정’ 대 이은 항일로…600여년 동민들과 더불어 삶 실천

보산정사 [남도일보]

영산강변 나주 다시면 초동마을과 죽지마을엔 각각 공동체 문화를 일군 상징물 보산정사와 호남유학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실천적 선비들의 토론장 소요정이 있다. 편의상 마을 이름을 달리하지만 2~3㎞ 밖에 안 떨어진 하나의 공동체이다.

이 마을엔 국난과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향약과 동계로서 가학을 계승하고 정자문화와 미풍양속을 전승한 나주 함평이씨 참판공파 후손들과 동민들이 600여년 더불어 살아간다.

이극명(1388~1454)이 공신이 되고 함평군을 하사받으면서 죽지마을에 터를 잡았다. 이종수(1424~1483)는 무관으로 활약하다 병조참판에 사후 추증돼 참판공파의 파조가 된다.

그의 아들 소요당 이종인(1458~1533)은 문무겸전의 명장으로 무과급제해 해랑도초무사 종사관으로 해적을 사로잡기도 했으며, 전라도수사, 함경북병사를 거쳐 병조참판에 올랐다. 이종인은 전라좌수사 재직때 추자도에 침범한 왜적을 섬멸했다.

은퇴 후에 나라를 걱정하는 선비들의 토론장, 소요정을 지었다. 눌재 박상, 고봉 기대승, 백호 임제, 옥봉 백광훈 등 후배 학자들이 소요정에 시를 남겼다.

초동마을 보산정사는 이종인의 손자 이유근(1523~1606)등 8인이 창건하고 학문을 강론하며 동시대 명사 기대승 등과 시문을 주고 받은 학문의 전당이다.

예조정랑, 대구부사 등을 지낸 이유근은 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을 때 시로서 감복시켜 명 황제로부터 연주옥패를 선물 받았다. 동서붕당을 뒤로하고 낙향해 백호 임제, 회재 박광옥과 교유했다.

동생 이유회(1534~1603) 등 10인은 사동 십호동계를 결성하고 자치 향약을 만들어 실시했다. 보산정사 등 종가의 유적들을 거점으로 했으며, 오늘날까지도 백일장 등 향촌 교육 도장으로 운영된다.

15세 이지효(1551~1614)는 무관으로 복무하는 동안 정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가 사후 형조판서에 추증됐다. 이지득(1555~1594)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내어 의병을 모으고 활약하다 흥양포(고흥) 전투에서 순절했다. 아들 이선경(1579~1626)도 임진 의병으로 활약했다.

종가는 연주옥패를 비롯해 농포유고·사은유고·남파유고 등 문집과 고문서, 소요정·남사정·남파정 등 정자, 이지효·이지득 충신정려 등 가문의 유산을 잘 보존하고 있다.

함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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