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재난지원금·국민연금이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국민연금이 있었다?

추수한 쌀이 다 떨어지는 춘궁기는 조선 시대 서민들에겐 피할 수 없는 굶주림과 고통의 시간이었다.이 때 쌀을 빌려주고 가을에 되받는 춘대추납제도로 운영한 조선의 복지 정책이 그 유명한 환곡이다. 환곡에 투입되는 쌀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1725년(영조1년)에는 환곡으로 빌려주는 곡식이 약 3백만 석에 달했다. 이는 당시 조선 인구 절반의 1년 치 식량이다.

환곡의 지속가능성은 환(還), 즉 이자에 있다. 최초에 정한 이자는 2%이었지만 16세기 중반에는 10%로 올라갔다. 이렇게 거둬들인 이자는 지방 재정으로 쓰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오면 환곡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곳간이 비어버린 것이다.

만성적인 재정 고갈로 중앙 기관과 지방 관청, 고을의 백성 모두 카드 빚 돌려 막듯 환곡을 이리저리 돌려 막고, 쌀을 빼돌리는 일이 많아지면서 복지 제도가 오히려 백성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조선 시대 복지 제도를 살핀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들녘)의 저자 박영서는 사회보장제도로서 환곡과 국민연금의 공통점을 찾아낸다. 재정이 고갈돼 연금 수령이 불확실해질 수 있다는 점, 세금과 다름없는 의무 가입, 소득 재분배 효과보다 중산층 혜택, 미래 세대에 부담 등을 꼽는다.

조선은 환곡의 이자를 지방 재정에 쓰도록 했는데, 낮은 세율을 유지하면서 수입과 지출을 맞추려 했기 때문에 지방 재정은 만성 적자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는 지적이다.

현대에 들어 생겨난 복지국가 개념과 규모와 성격이 다르지만 저자는 조선 시대의 구황과 진휼 등의 제도를 복지정책 선상에 놓는다.

천재지변이나 기근 등으로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현물과 곡식 등을 지급하는 제도로 지금의 재난지원금에 해당한다.

복지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과 영조, 정조 재위기 진휼은 국책 사업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추진됐다.

한 예로 역대급 재난 중 하나인 1445년 세종 27년 흉년이 들자, 조정은 21만 7000세대에 273만 8000석의 곡식을 무상 지급했다. 약 80만 가구가 혜택을 봤다. 당시 인구의 13% 이상이 아사를 면한 것이다.

조선은 시식이라는 무료급식소도 운영했다. 떠돌아다니며 밥을 구걸하는 유민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는 진제소 또는 설죽소를 운영했다. 지방 관아에선 흉년이 들 때마다 무상 급식 사업을 진행했다. 이는 국가의 중대 사업 중 하나였다. 숙종은 설죽소를 설치한 후 죽의 품질이 꾸준히 유지되는지 몰래 사람을 보내 죽을 타오게 했다.

저자는 조선의 복지 정책의 핵심을 사람에 대한 존중, 즉 인(仁)으로 해석한다. 조선 사회는 빈곤층을 인(仁)으로 바라보고 빈곤이 발생한 건 그들이 나태하거나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왕의 부덕 때문이라고 봤다. 즉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또한 조선의 설계자들은 빈곤층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인격적 완성을 이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복지 정책을 통해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고 인의 가치가 확장되는 이상 사회를 꿈꾼 것이다.

저자는 사료를 바탕으로 복지 정책의 생생한 현장을 되살려 냈다. 특히 조선의 복지 정책을 통해 현재 복지국가의 모습을 어떻게 상정해야 할지 돌아본 점이 눈길을 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박영서 지음/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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