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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은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지 만 1년이 되는 날이었다.
2019년 7월6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제43차 회의를 열고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으로 등재한 바 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모두 9곳. 풍기군수 주세붕이 중종 38년(1543)에 ‘백운동서원’이라는 명칭으로 건립한 조선 첫 서원인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으로 구성된다.
16∼17세기에 건립된 이 서원들은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훼손되지 않았고 2009년 이전, 모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돼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교육 시설로 향촌 지식인들에 의해 건립됐으며 교육을 기초로 국가 통치 철학을 구현해낸 한국의 사회문화적인 특징을 잘 드러낸 곳이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에 대해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하는 한국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라면서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따라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계유산 필수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한편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이 지닌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 완전성은 인정하면서도 9개 서원에 대한 통합 보존관리 방안을 수립하라고 권고한 바 있는데 한국 문화재청에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기존 관리에 더해 지방정부와 협력해 보존관리를 빈틈없이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우리나라는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이상 1995년), 창덕궁, 수원 화성(이상 1997년),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 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2018년)을 포함해 세계유산 14건을 보유하게 됐다.
세계 속의 한국으로 나날이 성장해가는 고국의 문화유산을 정취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먼 타향살이를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된다. 재외 언론이 한국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지는 한국언론재단과 세계한인언론인협회 지원으로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1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의 서원 9곳을 돌아보는 현장탐방을 창간 15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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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이주한 후, 19년을 미국에서 살다 귀국했다. 고백하건대 한국에서 유년 시절이며 중고등학교 대학 졸업에 직장생활을 12년 넘게 했으니 내 삶의 자양분은 완전 한국의 문화다. 자양분을 떠나 이식된 타국에서의 삶은 제대로 그 나라의 문화를 즐길 만큼 여유 있지 못했다. 매월 따박따박 납부해야 하는 월세에 각종 공과금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준비금으로 남겨놓아야 하는 보험까지 한 달 단위로 가계부를 옥죄는 미국의 고물가에서 아이 키우며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은 일하는 직업의 특성상 미디어에게 제공되는 초대권으로 뮤지컬이며 전시회 등등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메말라가는 감정의 속도를 간신히 늦춰왔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은 이민자가 구사할 수 있는 영어란 여전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뮤지컬을 보고 연극을 보고 전시회를 가서 작가를 만나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자괴심으로 작품들을 만나도 감정의 울림이 없어 더욱 괴로웠다.
그럴수록 깊어만 가는 두고 온 것에 대한 그리움은 다름 아닌 한국의 문화들이었다. 내가 귀를 쫑긋하지 않고 온갖 정신을 집중해서 듣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하고 웃을 수 있는 문화유산과 대중문화에 대한 갈망이 차츰 커져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
이때쯤 나의 한국에 대한 관심을 폭발시킨 것은 전적으로 TV 프로그램이었다. 2018년, tvN에서 방영된 ‘알쓸신잡’ 시즌2에 등장한 안동의 서원들은 속된 말로 나를 그냥 ‘뿅’ 가게 했다.
유현준 홍대 건축학과 교수가 새로운 패널로 등장했던 시즌 2에서 알쓸신잡 팀이 방문한 안동의 기품 있으면서 수려했던 자연경관과 서원의 조화는 미국 이민생활에서 지칠 대로 지쳐 황폐화되고 있던 내게 큰 위안을 가져다 주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살 때에는 전통문화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한국으로 다시 되돌아온 후, 한국의 사찰을 다니고 국악 공연에 서원까지 다니게 된 배경에는 이런 갈증과 목마름이 아마 폭발했기 때문이리라…
미국에서 여행을 떠나려고 계획을 세울 때에도 늘 먼 나라만 기웃거렸었다. 내 고향은 정작 가본 곳도 별로 없으면서 말이다. 나는 내가 가보지 않았던 고국의 땅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밟아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오랜 대학 친구와 선배까지 의기투합한 안동 여행의 하일라이트는 누가 뭐라 해도 서원 코스였다. 미국 시카고에서 날아온 이들을 픽업해 경북을 향해 떠나는 여행길은 가벼운 흥분으로 가슴이 콩콩 거렸다.
‘아~ 마침내 경북 땅을 한번 밟아보는구나!!’ 생각해보니 한국에 살면서 경상북도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반도 지형을 똑같이 닮은 강원도 영월 선암마을에서 한반도 지형을 구경하고 뗏목을 타고 흐르는 강물에 발도 담가 보았다. 단종 유배지인 청룡포를 둘러보고 늦지 않게 경북 영주로 넘어가야 했다. 청룡포에서 영주로 가는 길을 내비게이션에 넣었더니 김삿갓 계곡을 가르친다.
서늘한 김삿갓 계곡의 풍경에 이야기 꽃을 피우며 운전을 하다가 우리는 갑자기 신세계로 인도됐다. 지도에서 도로가 어느 순간 사라진 듯 왕복 일차선도 아닌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숲 속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반대편에서 오는 차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 차가 올라치면 차 한 대 겨우 갈 수 있는 길을 지나기 위해 반대편 차가 기다려주거나 아니면 우리 차가 기다려야 하는 그런 숲 속 오솔길을 달리게 된 것이다.
내비게이션은 계속 이 길로 가라 하고… 저녁 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갑자기 어두워진 이 길의 끝이 경북 영주로 통하긴 하는 건지 도저히 자신할 수 없었다.
약 1시간 정도를 더듬거리며 운전을 하고 나니 마침내 영주 부석사 이정표가 눈앞에 나타나며 갑자기 길이 넓어진다. 나중에 이 길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보부상들이 넘었다는 마구령이었다. 세상에나~ 내년에 이 길을 트레킹 할 것을 목표로 해본다. 잘 될지 모르겠지만…
부석사의 일몰을 보기 위해 부지런히 올라갔다. 애초 여행 스케줄에 거의 한 치 오차 없이 시간이 맞아떨어진다. 여행 일정이 이렇게 계획했던 대로 진행되면서 약간의 희열이 느껴진다. 하지만 여행의 맛이 또 이런 건 아닌데 아쉬움도 생긴다. 사람이 간사하다. 내일부터 펼쳐질 서원 파노라마를 기대하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우리의 코스는 소수서원과 병산 서원을 거쳐 도산서원을 마지막으로 이육사 문학관을 방문하는 일정이다. 이른 아침 방문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규모도 컸고 관리 상태도 모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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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소개의 첫 문장이다. 무너진 학문이란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뜻일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사는 이들이 많다. 물론 사유와 성찰로 책을 가까이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사회에 적응하느라, 가정을 꾸리느라 우리 스스로 연마를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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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를 연마하지 않는 시간에도 나이는 계속 먹는다. 나이 많은 것이 자랑이 아닌 세상이 됐다. 게다가 모든 것이 테크놀로지로 통하는 현대 세상에서 급변하는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뒷방 늙은이가 되지 않으려면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과 지혜가 있어야 한다.
나이 듦이 완고함과 불통, 뒤처짐과 동일한 단어로 이해되는 한국 사회에서 평생 나를 연마해야 한다는 자기 다짐을 하며 소수서원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놓아야 할 것 세 가지. ‘시간’과 ‘나이’, 그리고 ‘고정관념’이라는 어느 정신과 전문의가 강연해서 말했던 내용이 새삼스럽게 이해된다. 원숙하고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것. 사유와 성찰을 통한 평생 학습만이 정답이다.
영주(경북)=이명애 /서울 지사장
●영주 소수서원
한국 최초의 서원으로 본래 명칭은 백운동 서원이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성리학자 안향(安珦)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이다. 이후 1549년(명종 4)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에게 요청했고 1550년(명종 5) 어전회의에서 좌의정 심연원(심통원의 친형)의 주청으로 명종이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내리고,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및 노비도 하사했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서원의 시초로 이로써 나라가 인정하는 사학(私學)이 되었다. 사액된 뒤 소수서원의 입학 정원은 10명에서 30명으로 늘어났으며, 또한 서원의 원생들이 배움에 충실하도록 이황은 서원에서의 학업 규칙을 정하고 배움의 장으로서의 서원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힘썼다.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자들이었고, 학문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 곧바로 퇴학을 당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임진왜란 때에 경상 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의 좌의정이었던 정탁도 있었다.1633년(인조 11)에 설립자인 주세붕을 기리는 사당이 추가됐고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전국에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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