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희의 커피 이야기]그와 커피 한 잔 하고 싶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새 생두가 오면 일단 그 생두와 어울릴 로스팅 단계를 상상해 본다. 인터넷을 통해 그 생두가 원래 가지고 있는 맛과 향도 상상해 보고 그 생두로 로스팅한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여기저기 뒤져 알아본다. 그럼 대충 어느 정도로 볶아야 하겠구나라고 정해지지만 그럼에도 일단 볶기 시작하면 라이트, 미듐, 다크 세 단계로 모두 볶아본다. 그리고 그 세 단계로 로스팅된 원두를 맛보고는 그중 가장 어울릴만한 단계를 정해 거기에서 다시 세분화를 해서 로스팅을 하게 된다. 그렇게 가장 괜찮은 로스팅 단계를 일단 정하고 보면 처음 인터넷을 통해 알아본 로스팅 단계와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얻는 정보와 다른 로스팅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로스팅은 보통 크게 Light, Medium, Dark  3단계로 나뉘지만 조금 세분화하면 8단계로 나뉘게 된다. 8단계는 약하게 볶는 것에서 점점 강하게 볶는 순서로 Light, Cinnamon, Medium, High, City, Full City, French, Italian 으로 나뉜다. 첫 단계인 Light Roasting은 표기만 Light일 뿐 실제 로스팅 단계는 Extremely Light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라이트한 커피를 맛볼 일은 거의 없다. 다음 단계는 Cinnamon인데 이 로스팅은 우리가 흔히 아는 라이트 로스팅보다 살짝 더 라이트 한 경우에 쓴다. 그 다음 단계가 Medium인데 이 경우가 우리가 생각하는 라이트 단계다.

내가 느끼기에는 이 단계에서 가장 좋은 산미가 나온다. 산미가 도드라지는 에티오피아나 파나마 쪽 커피가 잘 어울린다. 그 다음은 High인데 이 경우가 우리가 아는 Mediun Light 단계다. 밸런스 좋은 산미를 좋아한다면 이 단계를 추천한다. 그 다음이 City인데 이 City Roasting 은 가끔씩 표기되어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 시티 로스팅이 우리가 아는 미듐 로스팅이다. 밸런스 좋은 남미계열 커피와 잘 어울린다. 그다음 단계가 Full City인데 이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 Full City 단계가 미듐다크 로스팅인데 요즘 같이 스페셜티 커피와 새로운 가공방식의 다채로운 커피들이 나오기 이전에 좋은 커피라 하면 보통 이 단계로 볶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예전 명품커피라 불린 예멘 모카, 하와이 코나,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탄자니아 AA 모두 시티나 풀시티로 볶는 경우가 많다. 다음 단계는 French인데 이 경우가 우리가 아는 다크 로스팅이다. 이 경우는 한눈에 보기에도 콩이 진한 검은색이다. 그 다음단계가 Italian인데 콩의 겉표면에 기름이 묻어 나오는 것이 보이면 Italian Roasting이라 보면 된다. 요즘은 이렇게 까지 콩을 다크하게 볶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프랜치나 이탈리안 로스팅 단계까지 볶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로스팅을 크게 3단계나, 세분화해서 8단계로 나누기는 했지만 실제 로스팅을 하다 보면 이 커피를 마실 사람에 대한 내 감정과 느낌에 따라 로스팅을 밀고 당기게 되곤 하지만 그 결과물은 항상 아쉽다. 그러다 보면 커피를 볶는 행위는 마치 작품활동 같아서 커피 생두를 전시장에 디스플레이하는 행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리저리 배열해 보지만 뭔가 내가 애쓴다고 해결될 것 같지 않는… 깊은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유명 대형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어마어마한 작품들이 엄청난 아우라를 뿜으며 전시되기도 하고 이름 없는 조그마한 갤러리나 상점에 이름 없는 작가들의 작은 소품들이 전시되듯 대형 커피회사나 이름 있는 로스터리에서 볶아지는 맛과 향이 어우러지는 멋진 커피가 있는가 하면 내가 볶는 커피처럼 그저 한가한 사람의 손끝에서 나오는 소박한 커피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서 볶아지든 지금 볶아지는 모든 커피는 전시장의 질서에 의해 박제된 작품과도 같다. 마치 무한이 유한에 의해 붙잡혀 박제된 느낌말이다.

우리는 1과 2 사이에서 어떤 숫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도와 레 사이에서 어떤 음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색으로 비유하면 노랑과 초록 사이에서 어떤 색이 튀어 날 올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긴장감이 곳곳에 있다.  긴장감은 좋게 말하면 우리 일상의 평온함, 혹은 너무 평온해 기존 질서 속에 박제화된 그런 상태에서 뭔가 아쉬운 느낌에 적당한 흥분을 준다. 혁명인 듯, 혁명 아닌 혁명 같은, 느낌으로만 혁명인 그런 느낌?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나간 지 14년이 되었다. 박제화된 한국 정치를 벗어나려고 애썼던 사람, 박제를 거부하던 그를 끊임없이 박제화시키려 했던 언론(진보 보수 마찬가지 였다)과 그 알량한 기득권(역시 진보 보수 할 것없이)은 그가 주던 긴장감을 거세시켜 버렸다.

긴장감이 사라지자 우리 지지자들 조차 거세된 긴장감의 원인을 찾기 보다 그를 비난하기 바빴다.

콩은 좋았지만 로스팅에 의해 폄하된 사람, 그가 그립다. 그가 가지 않았다면 그와 커피 한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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