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8일(현지시간) 라스베이거스에서 노동조합원들 앞에서 선거 캠페인 연설 후 박수를 받고 있다. [AP] |
[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야심차게 추진했던 ‘노동자 중심의 무역정책’이 좌초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수혜자인 노동자도, 여당인 민주당도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중심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맞서는 대선에서 오히려 역풍을 몰고올 가능성도 제기된다.
미국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2일(현지시간) 노동과 환경 기준 협상이 무산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무역 부문과 교착 상태인 유럽연합(EU)과의 철강 관세 협상을 예로 들며 “세계 무역의 규칙을 다시 쓰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야심찬 계획이 선거철에 접어들면서 좌초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폴리티코는 “국내에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도 해외에서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글로벌 무역 의제를 설계하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꼬집었다.
지난해 11월 아시아·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기간 동안 협상 최종 타결이 유력했었던 IPEF는 미국이 무역 부문에서 노동과 환경 관련 협상 중단을 선언하면서 공급망·청정경제·공정경제 부문만 타결됐다. IPEF를 통해 미국과의 경제 협력을 가속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아시아 국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IPEF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미국이 주도해 온 다자 경제 협력체로 아시아와 태평양 일대 14개국이 참여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무역 부문 협상을 무기한 중단한 것은 의회, 특히 여당인 민주당의 반발이 예상 외로 컸기 때문이다.
오하이오 주에서 재선을 노리는 민주당 셰로드 브라운 상원의원과 위스콘신 주의 같은 당 태미 볼드윈 상원의원이 “(IPEF)로 인해 노동자들이 바닥을 향해 경쟁하는 시대로 되돌아갈 우려가 있다”며 협상 중단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들은 무역과 관련된 이슈가 어떤 방식으로든 노조의 지지율에 악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선거 전망이 유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백악관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IPEF의 무역 부문은 아시아 국가들의 노동 및 환경 조건을 강화하도록 강제해 미국 노동자의 상대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대신 상대 국가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개발 금융의 인프라 투자를 더 쉽게 받을 수 있게 해주는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기존 무역 합의와 달리 이번 협상에서 관세 인하는 배제했다. 무역 상대국에 대해 관세를 낮춰주면 미국의 일자리를 노동 비용이 낮은 국가에 ‘아웃소싱’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 미국 노동자의 피해로 돌아온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선 경쟁 상대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6년 대선 과정에서 TPP 탈퇴를 공약하면서 노동자의 표심을 휩쓴 것도 감안했다.
그러나 민주당 상원의원과 미국 노동계는 7차례에 걸친 협상에도 불구하고 IPEF 무역 부문 협상이 아시아 국가로 하여금 노동과 환경 규제를 강화하도록 강제하는 데 실패했다고 보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국제 노동기준과 최저임금, 근로시간 규제를 아시아 국가들에게 요구하는 것 만으로는 미국 노동자 일자리를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브라운 상원의원은 “구속력 있는 노동규제와 환경보호가 결여된 협상은 없느니만 못하다”며 자신의 당 소속인 바이든 대통령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바이든 행정부의 무역 협상을 이끄는 캐서린 타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우리가 직면한 것은 변화에 대한 저항과 우리가 실현하려는 것의 지연”이라며 의회의 반발에 실망감을 표시했다.
IPEF에서의 실패는 EU와의 철강 협상의 무기한 연기로 이어졌다. 최근 바이든 행정부는 유럽산 철강과 알루미늄 수입 쿼터 물량에 대한 관세 부과 유예조치를 2년 연장한다고 발표헤야 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철강(25%)과 알루미늄(10%) 고율 관세 적용시점을 2025년 12월 말까지 늦추는 대신 무역 관련 의제가 또다시 정치 이슈로 떠오르는 것을 막은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미 모든 국가에 1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상황이다. 그는 IPEF가 타결되더라도 재집권 후 TPP처럼 탈퇴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없이는 IPEF 의 출범 자체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지난 2022년 11월까지 바이든 행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국제 경제 부문을 맡았던 피터 하렐은 “바이든 행정부의 예상보다 유권자들은 무역에 대해 적대적”이라며 “오늘날 무역은 아마 대선 이후에나 논의할 수 있는 의제가 되겠지만 바이든이 승리할지 트럼프가 승리할지에 따라 그 양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