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검은 토끼의 해’ 계묘년(癸卯年)을 보내고 ‘비상하는 푸른 용의 해’ 갑진년(甲辰年)이 밝았다. 작년 우리 경제는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황에서도 어려울수록 강해지는 국민성과 토끼의 지혜로움으로 대과 없이 슬기롭게 대처했다. 그래도 조금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보험금 지급 관련 민원을 들고 싶다. 금융감독원에 의하면 연간 민원 건수가 5만건 수준이라고 하니 보험민원 적체 문제는 근시일내에는 해소될 것 같지 않다.
최근에는 암 요양병원 입원환자들이 보험사 건물 앞에서 실손보험금 청구 집회를 가졌다고 한다. 몇 년 간 떠들썩했던 암 환자 입원보험금 문제가 실손보험으로 옮겨 붙는 양상이다. 암환자 입장에서 보면 치료에 필요해서 입원한 것이니 당연히 실손 치료비는 암 입원비와 관계 없이 지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보험회사는 ‘암 치료와 직접 연관성이 없는 입원은 약관상 보상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2020년 대법원 암입원금 분쟁 판결 등을 근거로 둘 다 ‘입원의 필요성’이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암 요양병원에서의 과잉진료 및 과다청구 사례, 심지어 암입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통원환자 관리까지 해주는 도덕적 해이 사례도 파악되고 있어 보험금 누수를 막기 위해 심사를 까다롭게 할 수밖에 없다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듯 한데, 어쨌든 병원과 보험사 사이에서 병 관리에 전념하지 못하고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환자들이 너무도 안타까울 뿐이다.
실손보험은 통원 의료비는 20~30만원이 한도인데 반해, 입원 시에는 한도가 5000만원까지 늘어나다 보니 늘 ‘입원 필요성’ 여부가 말썽이다. 즉, 보험회사는 입원을 약관에서는 ‘질병으로 인하여 치료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경우로서 자택 등에서 치료가 곤란한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어 암 환자라 하더라도 수술 및 항암 치료 등이 끝나고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면 통원의료비 한도내에서만 보상하는 것이 타당하며, 지급 거절 대상은 대부분 암 수술 또는 항암치료 종결 후 요양병원에서 고주파나 온열 치료, 주사제, 도수치료 등 면역이나 후유증 관리만 주로 받은 경우에 한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에는 암 환자라면 관행적으로 넓게 보상해왔으나, 최근 암 요양병원 비급여 치료비 상승이 이러한 보상 관행에 영향을 준 것 같다.
필자가 암 요양병원별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고주파온열 치료비는 최저 15만원 ~ 최고 150만원으로 7배, 셀레나제(항암약제)는 최저 3500원 ~ 최고 7만원으로 20배나 차이가 나는데, 특히 약제는 관련법상 ‘의약 분업(처방은 의사가 조제는 약사가)’ 원칙이 입원환자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므로 약국 간 가격경쟁 등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가격과 민원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위의 예에서 고주파 온열치료비나 항암면역제 비용이 최저 수준에서 청구되었다면 보험사가 지금처럼 입원 필요성 등을 따져가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을까? 결국 실손보험 분쟁의 본질은 ‘가격’이 관건이라 할 것이고, 이에 대한 고민이 없는 한 암환자와 보험사간의 줄다리기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건 뿐만 아니라 그간 백내장, 도수치료, 언어치료 분쟁 이슈, 보험료 대폭 인상 문제 등 연 이은 악순환의 고리는 따지고 보면 명목상으로는 ‘의사와 환자간 사적 자치의 영역’에 속하나, 현실적으로는 환자에게 가격 결정권이 없다는 데 있다고 본다.
참고로 약자인 환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보험회사는 먼저 환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고 과다 청구한 병원을 상대하면 될 것도 같은데, 요양기관을 상대로 한 부당이득 반환/손해배상 청구 소송 등에서 대부분의 보험회사가 패소하여 보험금 지급 후에는 회수가 어렵다 보니 아예 처음부터 보상심사를 깐깐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보험은 수많은 가입자들이 납부한 돈을 재원(기금)으로 사고를 당한 소수에게 몰아주는 상부상조 제도이다. 이 때 납부할 보험료는 사고율과 지급금액을 토대로 산출하므로 지속가능한 실손보험의 운영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정도와 수준의 치료, 그리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진료 비용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백내장 분쟁사례만 보더라도 한 때 한쪽 눈만 1000만원, 양쪽 눈에 2000만원의 실손보험금이 청구된 경우도 있었는데, 진료비 내역에는 집도의의 전문성과 경험 등과는 다소 무관해 보이는 렌즈값(치료재료)이 80%(약 800만원)를 차지하는 등 납득하기 쉽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에는 백내장 시술비가 1/4~ 1/5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하니 처음부터 청구 가격이 적정했다면 그 많은 분쟁이 시작 되었겠는가 싶을 정도다. 다시 말해 백내장 환자가 급증해서 청구가 늘어난 게 아니라 렌즈값 상승으로 시술 수요가 늘어나고 이것이 깐깐한 지급 심사를 촉발해 민원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은 아닌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 보건·금융당국도 지속가능한 실손보험을 기치로 다각적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어렵겠지만 의료비 책정에 시장경쟁원리나 관심을 갖는 소비자들에 대한 인센티브 부여 등 다각적인 고민과 접근이 필요함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부디 올해는 당국과 보험·의료업계 관계자들이 허심탄회하게 만나 조금씩 양보하여 모두에게 이로운 해법을 찾아내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이후록 법무법인 율촌 수석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