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애도 지휘한 ‘신년음악회’ 단골인 ‘이 곡’, 이탈리아에서 연주하면 몰매 맞는다?! [세모금]

다니엘 바렌보임 빈 필 신년음악회 [유튜브 캡처]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009년을 시작으로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를 총 세 번(2014, 2022) 지휘한 다니엘 바렌보임. 날렵한 지휘봉을 든 손을 높이 올린 채 스네어 드럼에 맞춰 ‘개선 장군’처럼 입장한다. 마에스트로가 포디움에 도착하자, 객석에선 음악에 맞춰 박수가 등장. 거장 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마주하는 대신 관객을 향해 “박수 소리를 줄이라”며 지금은 ‘오케스트라의 순서’라는 손짓과 함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제 곧 관객의 순서. 청중을 마주한 바렌보임의 ‘크게 소리내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탁월한 박자 감각을 입은 우레가 같은 박수가 빈 무지크페어라인을 가득 메운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바렌보임의 표정이 압권. 빈 필 신년음악회의 앙코르 곡,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이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해마다 1월 국내외 주요 신년음악회 ‘단골 앙코르’ 곡으로 유명하다. 1월 한 달간 이어질 국내 주요 악단들의 신년음악회에서도 이미 이 곡은 레퍼토리에 들어갔다.

올해 국내 신년음악회에서 이 곡을 첫 번째로 연주한 지휘자는 성시연. 그는 지난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함께 한 두 번의 신년음악회(5일 서울시향 주최 세종문화회관, 7일 대원문화재단 주최 예술의전당)를 통해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힘찬 새해를 알렸다. 지난 14일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에서도 이 곡이 울렸다. 다비트 라일란트 예술감독 역시 이 곡으로 관객을 하나로 모으며 공연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처럼 새해의 문을 힘차게 열 때 주로 연주되는 ‘라데츠키 행진곡’가 사실 이탈리아에선 ‘원수의 음악’이다. ‘왈츠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작곡한 ‘라데츠키 행진곡’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장군 라데츠키에게 바쳐진 곡인데, 이탈리아는 라데츠키 장군과 뿌리깊은 악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밀라노와 베네치아에서 일어나는 반란으로 끊임없는 충돌을 마주했다. 전쟁 초반 이탈리아 연합에 오스트리아는 열세를 보였지만, 라데츠키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일대에서 벌어진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 전쟁에서 무려 30만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학살 당했다. 이어 1848년 7월 24일, 라데츠키 장군은 롬바르디아 독립운동을 완전히 정벌했고,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에선 당대 최고의 인기 작곡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에게 장군을 위한 ‘축하곡’을 의뢰했다. 슈트라우스는 라데츠키 장군을 환호하는 대중과 병사의 유행가에서 착안해 왈츠풍의 행진곡을 만들었다.

그 해 8월 31일, 이 곡이 초연될 당시 역사적인 장면들도 연출됐다. 승리에 도취된 오스트리아인들은 무려 세 번의 앙코르를 외쳤고,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발을 굴렀다.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선 왈츠풍의 흥겨운 선율과 승리의 기쁨이 맞물린 곡이었으나, 이탈리아의 입장에선 피눈물 나는 박수 소리였을 것이다.

‘라데츠키 행진곡’이 신년음악회의 단골 곡이 된 것은 1950년대 이후다. ‘전쟁의 산물’이었던 이 곡은 1959년 빈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서 처음 연주됐고, 빈 필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자 음악회의 레퍼토리로써 전 세계로 확장됐다.

2018년 라 페니체 극장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한 세계적인 지휘 거장 정명훈 [유튜브 캡처]

그럼에도 이탈리아에서 만큼은 예외였다. 철전지 원수 같은 이 곡은 이탈리아에선 연주되는 일이 없다. 1792년 개관한 ‘불사조’라는 의미의 라 페니체 극장의 신년음악회에선 ‘적국’의 음악을 금기시한다. 2018년 라 페니체 극장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한 세계적인 지휘 거장 정명훈의 앙코르도 ‘라데츠키 행진곡’이 아닌, 베르디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었다. 이탈리아 방송사에선 전 세계에서 4억명이 시청하는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대신 라 페니체 극장의 신년음악회를 생중계한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음악의 메시지와는 별개로 앙코르에 안성맞춤인 곡이다. 승리한 장군을 위한 곡이었던 만큼 진취적이고 흥겹다. 가만히 앉아서 듣는 곡이 아니라, 절로 박수를 치게 만드는 스네어 드럼, 금관, 팀파니의 리듬감이 압권이다.

워낙 자주 연주되는 곡인 만큼 해석의 차이는 크지 않다. 이 곡의 백미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관객이 하나가 될 때 나온다.

바렌보임은 2박자 풍의 행진곡을 다소 느릿하지만 씩씩하게 이끌며 청중들의 박수가 나와야 할 부분과 소리가 잦아들어야 할 부분을 명료하게 구분해주며 관객마저 악단의 일부로 만든다. 바렌보임의 재치있는 표정과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장면들은 명지휘자의 카리스마와 음악의 마력을 일깨워준다.

성시연의 ‘라데츠키 행진곡’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빠르게 질주하면서도 간결함 속에 행진곡의 묘미가 살아났고, 환한 미소와 함께 관객을 마주하고 두 팔을 촥 펴며 지휘하는 순간에선 짜릿한 감동마저 다가왔다. 다비트 라일란트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은 ‘소통의 달인’이다. 평소 앙코르 곡에 있어서만큼은 대중적이고, 청중과 함께 할 수 있는 곡을 종종 고르는 라일란트 감독은 이날도 온화함으로 관객 참여를 이끌었다. 청중들의 박수 조절에 만족한듯 ‘엄지 척’을 선보인 것은 이날 ‘신년음악회의 명장면’이었다.

명지휘자들의 동작과 곡의 분위기를 가장 잘 살린 주인공은 배우 이영애였다. 지난 14일 종영한 드라마 ‘마에스트라’ 2회 콘서트 장면의 앙코르 곡으로 등장한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이영애는 ‘지휘의 정석’을 보여줬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를 조절하는 지휘자의 모습을 이영애 스타일로 해석했다. 이영애의 지휘를 지도한 진솔 지휘자는 “이영애 배우가 직접 골라 연주하게 된 이 곡을 통해 주인공의 의지와 굴하지 않고 헤쳐나가는 추진력을 담아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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