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갑부’ 집무실에 걸린 이 그림…30억 포기하고 자존심 지켰는데 [0.1초 그 사이]

[0.1초 그 사이]는 역대급 몸값을 자랑하는 작품의 면면을 들여다보는 코너입니다.

한 작품이 명성을 얻게 되는 데는 작품성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안목이 뛰어난 컬렉터나 큐레이터의 손을 거치는 것은 물론 스캔들, 법적 분쟁, 도난 사건, 심지어 예술계를 뒤흔든 저항까지…. 작품의 명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이처럼 다양합니다.

그리고 평판 높은 이런 미술품들은 단 0.1초 차이로 행방이 갈라지게 되죠. ‘찰나의 순간’으로 승부가 나뉘는 치열한 미술시장에서 선택받은 그림들, 그 안에 얽힌 속사정을 들려드립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요즘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마크 로스코, 주황, 빨강, 노랑, 1961. 로스코의 최고 경매가이자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높은 낙찰가를 기록했다. [크리스티]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눈으로 직접 봐야만 느낄 수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형상은 완전히 없어진 채, 색의 덩어리만이 모호하게 배치된 거대한 캔버스. 언뜻 보면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싶은 추상화인데, 이 그림 앞에 가까이 서면 신기하리만큼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누르지 못한 듯 주저앉아 오열을 하는 이들도 있고요. 미국 내셔널 갤러리 조사에 따르면,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린 사람들(60%) 중 70%는 이 그림 때문이었다고 답했습니다.

이 그림의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묵직한 울림을 주는 것일까요. 지금도 경매장에 나왔다만 하면 컬렉터들의 입찰 경쟁이 아주 치열할뿐더러, 낙찰가만 수백억을 호가하는 이 작품. 순자산만 278조원에 이르는 세계적인 부호이자 최대 명품그룹 재벌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의 집무실에도 걸려 있는 그림이기도 한데요.

마크 로스코, 자화상, 1936. [루이비통재단 미술관]

그런데 알고 보면 현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작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부자들의 집에 장식되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원망한 예술가였기 때문이죠. 그는 살아생전 미술이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실상을 거침없이 비판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에서도 그는 인간 본연의 숭고한 정신을 추구했지만, 정작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다른 의미로) 거부(巨富)들에게 ‘성공한 작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상황이 이러하면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현실과 타협했을 겁니다. 숱한 붓질의 세월만 20년 이상, 마흔 중반에 이르러서야 어렵사리 기회가 찾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괴로운 마음으로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1970)입니다. (한 인간의 인생이 이렇게나 복잡한 법입니다.)

46세의 마크 로스코 모습. 로스코 추상화를 구상하기 시작한 그의 전성기 시절 모습. [브루클린 박물관]
유대인 핍박 피해 온 미국…위안 받을 곳은 그림 뿐

우선 로스코가 처음부터 형태가 완전히 사라진 그림을 그렸던 건 아닙니다.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로스코는 유대인 박해와 학살을 피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고작 열 살이었죠. 그런데 불과 일곱 달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로스코는 신문팔이로 단 몇 센트를 벌며 간신히 살아내야만 했습니다. 삶이 가난 그 자체로 점철될수록 그는 오히려 치열하게 공부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아이비리그 명문인 예일대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행복은 잠시 그를 스쳤을 뿐이었습니다. 로스코는 2년 만에 중퇴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마크 로스코, 앉아있는 여인, 1930년. [마크 로스코 재단]

그가 학교를 그만 둔 이유는 미국 주류 사회 집단인 부유한 앵글로색슨 개신교도 백인들 사이에서 반유대주의가 널리 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받기로 한 장학금이 전면 취소돼버렸습니다. (훗날 예일대는 학업을 마치지 못한 로스코에게 미술학부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습니다.)

러시아에서도, 이를 피해 도망 온 미국에서도,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로스코가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대상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림이었죠. 당시 미국 뉴욕에는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의 공포를 피해 유럽에서 망명한 다양한 예술가들이 모였는데요. 이들의 서로 다른 독특한 표현 방법을 본 로스코는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미술에 더욱 매료됩니다. 그에게 미술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드러냄’ 그 자체였던 것이죠.

니체와의 운명적 만남으로 작품세계 완성

로스코의 초기작을 보면 도시인들이 느끼는 고독이 화면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그가 풍경화, 실내화, 정물화 등을 그리는 리얼리즘 시기를 벗어나는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쓴 책 ‘비극의 탄생’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마크 로스코, 무제(지하철), 1937년경.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마크 로스코 재단 기증]

이성과 야성, 상반된 두 요소가 만나 고대 그리스 비극을 탄생시켰다는 니체의 철학에서 로스코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큰 충격을 받습니다. 덕분에 그는 이기적인 욕망과 물질적 탐욕에 찌든 현대인들도 예술을 통해 정신적 공허함에서 구원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게 됩니다. 미술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분명해진 시기였죠. (그러나 이는 끝내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는 씨앗이 됩니다.)

비극적 경험이 예술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생각한 로스코는 전통적인 미술 양식을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혼란한 시대의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서 필요했던 건, 그에 맞는 새로운 언어라고 생각했거든요.

로스코는 작품에서 사물의 형상들을 단계적으로 없애나갔습니다. 훗날 ‘멀티폼(Multiforms·다형태)’으로 미술계가 이름 붙인 그의 1946~1949년 제작 그림들을 잠시 감상해 볼까요.

‘멀티폼(Multiforms·다형태)’ 연작 중 하나인 작품. 마크 로스코, 넘버 1, 1949.
‘멀티폼(Multiforms·다형태)’ 연작 중 하나인 작품. 마크 로스코, 무제, 1947. 2019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570만달러(약 67억원)에 낙찰됐다. [크리스티]

로스코 추상화의 시작을 보여주는 초기 작품들인데요. 공간감이 없는 색 덩어리에 밀린 형태들이 부유하듯 화면을 채웠습니다. 얇게 덧바른 색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분명히 말하건대, 생명의 맥박이 느껴지지 않는, 뼈와 살의 구체성을 결여한 추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과 환회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그림이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나는 생명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에는 관심이 없다고요.” 당시 로스코는 이렇게 밝혔죠.

그렇게 그는 완전히 새로운 형식을 실험했고, 대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마침 1940년대는 미국이 미국적 문화를 갈구하던 때였습니다. 세계사적 천운에 올라탄 첫 주인공이었던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에 이어, 로스코는 폴록의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예술세계로 사람들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1947년 3월, 젊은 컬렉터인 베티 파슨스와 연 개인전에서 로스코의 작품은 “환상적이다”라는 평단의 극찬을 받게 됩니다. 그는 파슨스와 계약을 맺고, 작품에 대한 매매 독점권을 줍니다. 마침내 갖게 된 자신만의 갤러리에서 로스코는 정기적으로 전시를 열었고, 그림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습니다.

특히 로스코는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본 앙리 마티스의 ‘붉은 작업실’ 작품을 보고 영감을 받는데요. 배경을 강렬한 원색으로 단순화 한 이 그림이 로스코의 마음을 사로잡았거든요. 이후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마침내 사물의 유한한 형태를 완전히 소거하기에 이르죠. 배경 위에 덩그러니 떠다니는 색면. 로스코는 경계를 흐릿하게 마감한 바로 그 색면으로 관람자와 드라마를 써내려갔습니다.

앙리 마티스, 붉은 작업실, 1911. [뉴욕 현대미술관]
“45cm 떨어져 작품 보세요”…로스코만의 독특한 감상법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거리는 ‘45㎝’. 로스코가 직접 밝힌 독특한 작품 감상법입니다. 그 거리에서는 캔버스의 가로 세로 길이가 2m 이상인 대형 작품을 한 번에 감상하기가 어렵습니다. 로스코는 관람자들이 작품의 색면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드는 초월적 체험을 하기 바랐던 것이었죠. 그림을 보는 이들은 무한히 확장되는 듯한 착시 속에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게 됩니다.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이 미적 대상이 아닌, 관객의 감정을 발동시키는 매개체 그 자체가 되길 원했던 겁니다. (그래서 로스코를 얘기할 때, 색면에 대한 형식적 논의는 무의미한 겁니다.)

“나는 오직 비극, 환희, 운명 등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크 로스코, 파랑과 회색, 1962. [1998 Kate Rothko Prizel·Christopher Rothko, 루이비통재단 미술관]

미술계는 로스코를 폴록과 함께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화파로 분류했는데요. 그가 이를 강력히 거부한 것도 결국 같은 얘기입니다. 로스코는 색이나 형태 따위의 관계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거든요. 미의 관점에서 그의 그림을 분석하는 비평가들에 대한 로스코의 응수는 침묵뿐이었죠. 그가 자신의 작품명을 무제라고 짓거나, 숫자나 색의 이름으로 표시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특히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로스코는 빛나는 적색이나 주황색, 노란색 계열을 주로 사용해 작품을 표현하는데요. 관람객을 황홀경에 들어가게 하는 이 감각적인 색상이 쓰인 이 시기의 그림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이때는 파란색이나 녹색을 좀처럼 쓰지 않았습니다.)

201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마크 로스코의 ‘주황, 빨강, 노랑’ 작품을 두고 입찰자간 치열한 경쟁이 붙은 모습. [크리스티]

실제 그의 역대 작품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에 판매된 작품도 이 무렵 그려진 ‘주황, 빨강, 노랑’(Orange, Red, Yellow)입니다. 게다가 추상표현주의 컬렉션으로 널리 알려진 컬렉터인 데이비드 핀쿠스가 1967년에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구매한 이후 4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던 작품이었죠. 이 그림이 미술품 경매 시장에 나온다는 소식에 전 세계 컬렉터들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겁니다. 지난 2012년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장에 출품된 이 작품은 7분간의 응찰 경쟁 끝에, 추정가의 두 배를 웃도는 금액인 8690만달러에 판매됩니다.

당시 한국 돈으로 치면, 그림 한 점에 약 1016억원에 달하는 셈입니다. 로스코의 최고 경매가이자, 세계대전 이후 활동한 작가 가운데, 그가 가장 몸값이 비싼 작가로 등극하게 된 순간입니다.

마크 로스코, 주황, 빨강, 노랑, 1961. 로스코의 최고 경매가이자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높은 낙찰가를 기록했다.(부분확대) [크리스티]
경매에서 판매된 로스코의 작품 가격 순위

5위: 무제, 1952. 6620만달러 (2014년 크리스티 경매)

[크리스티]

4위: 화이트 센터(노랑, 분홍, 라벤더 온 로즈), 1950. 7280만달러 (2007년 소더비 경매)

[AP]

3위: 넘버 1(로얄 빨강과 파랑), 1954. 7500만달러 (2012년 소더비 경매)

[소더비]

2위: 넘버 10, 1958. 8190만달러 (2015년 크리스티 경매)

[크리스티]

1위: 주황, 빨강, 노랑, 1961. 8690만달러 (2012년 크리스티 경매)

[크리스티]
로스코가 신념을 지킨 댓가 ‘30억원’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로스코의 대쪽 같은 신념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958년, 그의 나이 55세였습니다. 당시 유명 주류회사인 ‘시그램’은 뉴욕 맨해튼 본사에 들어설 ‘포시즌즈 레스토랑’ 벽면을 장식할 대형 회화를 로스코에게 주문했습니다.

당시 로스코는 돈과 유행을 좇는 호사스러운 장소에 영적인 울림을 주는 작품을 걸어, 욕망에 찌든 인간들의 입맛을 떨어뜨리게 하고, 그들의 정신을 일깨우고 싶다는 비밀스러운 목표를 세웠죠. 로스코가 제안을 수락한 이유였습니다. 당시 그가 주문받은 그림 9점의 대가는 3만5000달러. 오늘날 화폐 가치로 따지면 30억원 상당의 금액입니다.

포시즌즈 레스토랑 전경. [시그램]

그런데 이 작품들은 레스토랑에 걸리지 못했습니다. 1년여간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거의 완성될 무렵, 막 문을 연 레스토랑을 방문한 로스코는 분개하며 절망했죠. 자신의 그림이 그의 의도처럼 인간의 정신을 치유하는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보다, 그저 멋지게 차려입고 값비싼 음식을 먹으러 온 이들을 위한 한낱 고상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을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된 겁니다. 거들먹거리는 레스토랑 분위기에 화가 난 그는 그곳을 뛰쳐나옵니다.

결국 로스코는 30억원이라는 거금을 포기하고 계약을 파기했습니다. 대신 로스코는 레스토랑에 걸려고 그린 그림들을 영국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 기증하기에 이릅니다.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아무것도 놓여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철학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공간에 그림을 보내버린 겁니다. (현재는 테이트 브리튼으로 옮겨졌습니다.)

포시즌스 레스토랑에 걸릴 것을 염두하고 그린 마크 로스코 1959 작품. 현재 이 그림은 테이트 브리튼에 걸려 있다.
신념 지키려 극단적 선택…50년 후 회고전의 ‘아이러니’

그런데 그의 이런 ‘계약 파기’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면서, 되려 로스코는 명성을 드높이게 되죠. 로스코는 그림을 판매해 주는 갤러리가 없어도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거래할 수 있을 정도로 잘나가는 스타작가로 거듭납니다. 이 즈음 그는 더는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돈을 벌었거든요.

그러나 로스코의 정신은 피폐해져 갔습니다. ‘가난한 이민자’라는 그의 출신은 그가 예술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는데, 그의 예술적 경지의 완성이 결국 부자와 사회 기득권층의 인정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짓눌렀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비난했던 해악을 스스로 범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밖에요. 더 많은 미술관과 컬렉터가 로스코의 신작을 사려고 줄을 설수록 그는 점점 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습니다.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이 그저 돈 많은 이들의 ‘자랑거리’로 전락하게 됐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그가 추구한 초월적인 숭고한 정신은 색을 바래가는 듯 보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미국에서는 로스코와 정반대 성향인 팝아트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추상표현주의 운동은 서서히 막을 내렸고, 이와 함께 로스코는 갑자기 완고하고 고리타분한 기성세대가 돼 버린 것이죠. (당시 로스코는 팝아티스트를 “협잡꾼이자 젊은 기회주의자”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을 정도입니다.)

마크 로스코, 무제(검정 파랑), 1968. [필립스]

로스코는 불안하고 억눌린 감정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그가 1957년부터 죽기 전까지 무려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어둡고 우울한 색상만을 겹겹으로 덧칠하며 그림을 그린 이유였을 겁니다. 갈색, 회색, 짙은 파란색, 그리고 검은색….

그리고 그의 나이 67세. 순수하게 이상만을 열망했던 로스코는 끝내 자신의 생을 스스로 파멸시킵니다. 1970년 2월, 추운 수요일 아침. 작업실에서 손목을 그어 생을 매듭지어버린 그가 발견됩니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시뻘건 핏빛으로 가득 채운 한 점의 캔버스만 덩그러니 두고 말입니다.

마크 로스코, 무제, 1970. 로스코가 죽기 전 남긴 마지막 작품.

그리고 50년이 흐른 지금, 로스코의 67년 인생 ‘축소판’인 회고전이 진행 중입니다. 전시가 열린 곳은 프랑스 파리 루이비통재단 미술관입니다. 네, 바로 그 세계 1위 갑부인 아르노 회장이 이끄는 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입니다. 로스코가 그토록 거부해 마지않았던 것이 인간의 탐욕이었는데, 대표적인 기득권층이자 그것도 내로라하는 명품그룹 재벌이, 로스코의 작품성을 추앙하며 그를 위한 축제를 열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로 인해 여러분들이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관람객들이 로스코가 추구한 영원한 세계를 직접 마주하고 있기도 하고요.

참으로 모순 덩어리인 현실의 한 단면입니다.

프랑스 파리 루이비통재단 미술관에 걸린 마크 로스코의 그림. 이를 감상하는 관람객 모습. [EPA연합·겔랑]

〈참고자료〉

마크 로스코, 제이콥 발테슈바, 마로니에북스

The Other Side of Rothko: 5 Intimate, Must-See ‘Paintings on Paper’, Jo Lawson-Tancred, ARTNET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