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빅5’ 병원의 전공의들이 집단으로 병원 현장을 떠나면서 ‘의료공백’이 현실로 나타난 가운데 지난 21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 응급실이 환자와 의료진으로 붐비고 있다. 이상섭 기자 |
[헤럴드경제=안효정 기자] ‘저출산 고령화’라는 같은 현실 속에서 정부와 의료계는 의과대학 증원의 필요성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며 갈등을 이어오고 있다.
정부는 ‘고령화’로 의료 수요가 폭증하고 있다며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반면, 의료계는 ‘저출산’으로 1인당 의사 수가 늘기 때문에 의대 정원을 확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의대 증원 2000명’을 둘러싼 논쟁 중 대립되는 지점을 짚어봤다.
▶의사 수 부족한가=정부는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우선 가장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근거 자료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다. 지난해 7월 발간된 ‘OECD 보건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는 2.6명으로 회원국 평균(3.7명)보다 1.1명 부족하다.
정부는 여기에 고령화율까지 고려하면 미래 의사 수는 지금보다 더 부족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 고령화율(65세 이상 인구)은 19.1% 수준이다. 2035년에는 30%, 2050년엔 40%를 넘어 세계 최고령 국가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는 상황이다. 2035년 국내 80세 이상 고령인구가 2022년보다 82.7% 급증할 것이라는 통계청 추계도 있다.
고령인구가 늘어날수록 의료 수요도 증가하게 된다. 복지부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통계청 자료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2035년 전체 인구의 입원일 총합은 2억50만일로 2022년(1억3800만일)보다 45.3%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병원 외래 방문일도 2022년 9억3000만일에서 2035년 10억6000만일로, 12.8% 늘어날 전망이다. 소득이 늘수록 의료 소비도 늘어나게 된다는 ‘소득 탄력성’을 감안하더라도 인구 고령화로 의료 수요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는 예상이 나온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차관이 지난 22일 브리핑에서 “고령인구의 증가로 의료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은 예정된 미래”라고 목소리 높인 이유다.
복지부는 2035년엔 약 2만7000명(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50년엔 약 2만2000명(한국개발연구원)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국책 연구기관의 결과를 의대 증원의 근거로 들기도 했다.
주수호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이 지난 21일 오후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관에서 의협 비대위 정례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 |
반면, 의료계는 지금도 의사 수는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의사단체들은 국내외 의사 수를 비교할 때 OECD 평균이 아니라 한국과 의료시스템이 비슷한 일본(2.6명)이나 미국(2.7명)을 주목해야 하며, 이들 국가에 비해 한국의 의사 수는 적지 않다고 반박한다.
의료계는 또 한국의 의료 접근성과 이용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국민건강지표(기대수명, 주요 질환별 사망률 등)도 최상위권에 속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국민 1인당 외래진료를 받은 횟수는 연간 15.7회로 OECD 평균(5.9회)의 2.6배에 달한다. 의료계에선 이 횟수가 기형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의대 증원에 찬성하는 측은 외래진료 횟수는 많아도 ‘3분 진료’에 불과하다고 맞선다. 의사를 만나는 시간이 3분을 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의사 수가 부족해 환자들이 제대로 진료를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의료계는 급격한 출산율 감소를 주요 근거로 든다. 이동욱 경기도의사회 회장은 지난 20일 TV 토론에서 “수험생이 100만명일 때 의대 증원과 25만명일 때의 증원은 다르다”며 “(의대 정원을) 그냥 둬도 출생 수가 감소해서 의사 수 증가 폭이 30∼40%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대한의사협회(의협)를 비롯한 의사단체들은 국내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반면 의사 증가 속도는 OECD 최고 수준이라며 의대 증원이 아니라 ‘감축’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협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20년까지 활동의사 연평균 증가율은 2.84%로, OECD 평균 2.19%보다 높다. 인구 1000명당 활동의사 수 연평균 증가율도 2.4%로 OECD 평균 1.70%보다 1.41배 크다.
우봉식 의협 의료정책연구원장은 “2010∼2020년의 평균 의사 증가율과 OECD 장래 인구 수를 바탕으로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를 산출해보면 의대 정원을 늘리지 않고 현행으로 유지해도 2063년이면 OECD 평균을 앞지른다”고 했다.
경북도의사회 이우석 회장 등 도의사회 소속 의사들이 지난 15일 오후 7시 경북도의사회관에서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반발하는 규탄대회를 열고 의사가운 탈의식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 |
▶의대 증원, 건강보험 재정에 위협되나=의료계는 의대 증원 시 건보 재정 고갈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 원장은 이에 대한 근거로 유인수요 이론과 변호사 증원의 사례를 제시했다.
우 원장에 따르면, 유인수요 이론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Say’s law)을 전문직 시장에 적용한 것이다. 전문직 서비스 공급자가 증가하면, 그에 비례하거나 그 이상으로 전문직 서비스 수요가 증가해 전체 시장이 커진다는 논리다. 하지만 우 원장은 의사 공급보다 의료 서비스 수요의 증가폭이 더 커져 결과적으로 건보 재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한다.
우 원장은 “연구원 자체 추산 결과 의대생을 2000명 늘릴 경우 오는 2040년 국민 1인당 의료비가 매월 6만원 가량 더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구 1000명 당 의사 1명 증가 시 의료비는 22% 늘어난다’는 지난 2007년 건강보험공단의 연구 내용을 언급했다.
우 원장은 이와 비슷한 사례로 변호사 증원을 들었다. 그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이 도입되면서 지난 2013년 1만5905명이었던 변호사가 2023년 3만4182명으로 2.15배 증가했는데, 동일 기간 법률시장은 2.3배로 커졌다고 밝혔다.
우 원장은 “법률시장의 경우 100% 자가 비용 부담 원칙이 적용됨에도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며 “의료시장은 건보가 공유재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공유지의 비극’ 현상까지 초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대 증원 시 의료 시장에서도 무분별한 의료서비스 남용이 발생해 공유재인 건보 재정이 고갈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전공의들의 업무 복귀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 |
정부는 의료계의 이 같은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에 나섰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 19일 “의료비 지출은 정부의 과잉비급여 관리, 의료 남용 방지 등을 통해 철저히 관리해 나갈 것’이라며 “의료인력 확충은 오히려 의료비 지출의 급증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복지부도 의사 수와 진료비 증가율은 상관관계가 아니라고 말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전체 진료비가 7.9% 늘어난 데에는 수가 인상이 4.2%, 고령화가 2.1%, 소득수준 향상이 0.9%, 그 외 실손보험 확대 등이 0.7% 영향을 미쳤다. 의사 수가 진료비 상승 변수로 작용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박 차관도 지난 7일 라디오에 나와 “유인수요론은 1970년대 이론이고 이미 선진국과 우리나라에서 실증을 해봤더니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료비 증가는 의사 수와 별로 상관관계가 없다”며 “의료비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요소는 고령화, 소득수준”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