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석의 불편한 편집숍] 손흥민에겐 있고, 한국정치엔 없다

지난 2일(현지시간) 카타르 알와크라 알자 누브 스타디움 열린 2023 아시아축구연맹 (AFC) 아시안컵 8강전 한국과 호주의 경 기에서 손흥민이 연장 전반 프리킥으로 역 전골을 성공시킨 뒤 환호하고 있다. [연합]

‘월클, 리더, 인싸’

손흥민, 그리고 손흥민의 축구에 대해 짧게 말해야 한다면, 이 세 단어로 충분하리라.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월드 클래스’의 기량. 명문구단 토트넘에서도 주장으로서 팀원을 대표하는 ‘리더’. 세계적인 스타들 사이에서도, 유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팬들과의 만남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밝고 친절하며 적극적인 ‘인사이더’(인싸·다양한 사람들과 활발히 소통하는 사교성이 뛰어난 사람).

‘월클·리더·인싸’라는 표현은 손흥민에 대한 단순한 평가를 넘어 그에게 투영된 우리 국민들의 시대적 열망을 보여준다. 스타는 동시대 대중의 욕망을 반영하고 전시하는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 서사를 상징하는 ‘국가대항전’의 주인공으로서 스포츠스타는 국민을 대리해 외부의 적과 싸우는 전사로서 표상된다. 스포츠스타의 인기는 그가 대표하는 국가의 발전 상태와 시대에 따른 국민적 열망의 변화상을 반영한다.

그리고 손흥민의 시대가 왔다

1990년대말 ‘국가부도’사태를 맞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박찬호와 박세리가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파산·실직·자살·이혼 소식이 들려오던 우울한 시대, 박찬호와 박세리는 국민들에게 고단한 일상을 잊게 하는 세로토닌이었고 재기를 약속하는 희망의 근거였다.

비록 국가 경제는 근대화와 압축성장의 고속도로 마지막 나들목을 빠져나오기 전 불의의 사고를 맞고 말았지만, 박찬호와 박세리는 대한민국을 전쟁의 폐허로부터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까지 인도했던, ‘하면 된다’는 시대정신의 결과이자 살아있는 증거였다. 동시에 그들은 글로벌화된 프로스포츠 시스템과 마케팅 속에서 스스로 거액의 연봉과 우승상금의 주인공이 됐다는 점에서 과거 복싱 챔피언으로 상징되는 ‘헝그리 정신’의 신화와는 달랐다. 그들은 한국도, 한국 스포츠도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스포츠영웅이었다.

그 뒤는 박지성이 이었다. 그는 전세대의 축구영웅 차범근의 후계자였지만, 유럽 축구의 글로벌 마케팅이 아시아권 TV 중계로까지 확장된 이후로는 처음으로 글로벌 무대서 활약하는 국민적 축구스타였다. 그에게 괜히 ‘해버지(해외축구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술적으로도 물론 뛰어났지만, 근성과 성실성으로 더 정평이 났다. 박지성의 또 다른 별명 ‘두 개의 심장’, ‘세 개의 폐’는 유럽 그라운드에서 구현된 ‘한국적 헌신’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거기엔 유럽 축구계에선 아시아 혹은 한국 선수가 단지 ‘두 개의 발’만으로는 승부하기가 어렵다는 역설도 담겨 있었다. 그는 EPL에서 주연이기 보다는 조연급이었고 ‘우승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선 리더가 아니라 단지 ‘일원’일 뿐이었다.

그리고 손흥민의 시대다. 그가 EPL의 득점왕이 되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양발 뿐이었다. 그는 다국적의 동료들을 이끄는 인화력과 리더십으로 EPL 빅클럽의 주장이 됐다. 최근 카타르 아시안컵 대회에서 한국의 우승 실패와 이를 둘러싼 각종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손흥민을 향한 국민적 신뢰와 열광은 더욱 커졌다. 특히 후배 이강인과의 불화와 화해 과정에서 손흥민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을 뿐 아니라 더 강화했다.

손흥민을 향한 대중적 신뢰와 기대는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지지 못한 것, 결핍된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정치 지도자를 뽑는 제 22대 총선을 앞두고, 손흥민에게서 한국정치가 배워야할 것들, 우리 사회 지도자들이 깨우쳐야할 덕목은 무엇이 있을까.

손흥민의 축구는 본질에 충실하다

“날씨 좋은 어느 날, 바람의 여신이 그 사람의 발에,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고 무시당하는 그 발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면, 그 입맞춤으로 인해 축구의 우상이 탄생한다. 축구공은 그를 찾게 되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맞히며, 그를 필요로 한다. 그의 발등 위에서 마치 해먹 위에 누운 듯 편히 쉬곤 한다. 그러면 그는 공을 윤기 나게 반짝반짝 닦아서 말을 하게끔 하고, 그 둘은 수백만 가지의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평생을 쓸모 없는 존재로 취급받던 그 둘은 톡톡 주고받는 패스, 잔디 위에서 Z자를 그리는 드리블, 힐킥이나 오버헤드킥으로 멋진 골을 작렬시킨다. 이러한 묘기들로 인해 잠시 동안이나마 그들이 꽤나 괜찮은 인물들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상이 경기를 하면 그 팀은 열 두 명의 선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아니 열 다섯명, 스무 명!”

우루과이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저서 ‘축구의 빛과 그림자’에서 축구에서 우상의 탄생과 우상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갈레아노가 말한 ‘우상’의 의미대로, 손흥민이 손흥민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축구를 잘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라운드에서 뛰고 패스하고 드리블하며 적진을 뚫고 골을 넣는다. 그의 축구는 강하고 빠르며 정확하다. 축구의 순수한 기쁨을, 원초적인 쾌락을 팬들에게 선사한다. 그는 그 보상으로 부와 명예, 인기를 얻는다.

달리 말하자면, 손흥민의 연봉과 이적료와 각종 광고와 마케팅과 토트넘 팬들의 응원과 대한민국 국민들의 애국적인 열정보다 먼저, 손흥민의 축구가 있다는 말이다.

축구의 본질이 적진을 뚫고 골을 넣어 승리를 얻고 팬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정치의 본질은 국가를 성장하게 하고, 자원 배분을 공정하고 정의롭게 하며,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를 통합시켜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 보상으로 정치 지도자는 국민의 대표자로서 ‘합법적인’ 특권, 곧 명예와 권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종종 본질을 왜곡하고, 본말을 전도시켰다. 특정 개인과 세력이 특권을 얻기 위해 자원 배분을 불의·불공정하게 하며, 갈등을 조장하고 사회를 분열시켜 왔다.

손흥민의 축구는 협력적이다. 철저히 팀전술에 기반해 있으며, 팀전술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토트넘에서나 대표팀에서나 때때로 부당해 보이는 역할이나 대우를 강요받을 때조차도 개인보다는 팀의 축구를 앞세웠다. 주장과 존재증명은 그라운드에서의 플레이면 충분했다.

한국 정치는 어떠한가? 국가 차원에서도, 정당 차원에서도 전략과 전술은 부재하고, 정치인들은 국가의 당의 이익보다는 사리사욕을 우선한다. 국익과 정당정치를 이해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우리는 국가보다는 당을, 소속당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한국 정치의 민낯을 만난다.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카타르 도하 앗 수마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3 아시아 축구연맹(AFC) 카타르 아시안컵 조별 리그 E조 2차전 요르단과 한국의 경기 에서 전반 손흥민이 페널티킥을 성공시 킨 뒤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연합]

손흥민의 말과 태도엔 품위가 있다

이스라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 히브리대 철학과 교수는 저서 ‘품위 있는 사회’에서 “제도가 사람들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를 품위 있는 사회로 정의한다. 문명화된 사회는 “구성원들이 서로 모욕하지 않는 사회”다. 모욕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갈릿 교수는 “품위 있는 사회는 그 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갖는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다. 더 쉽게 말하면 품위 있는 사회에는 이등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손흥민의 말과 태도엔 이등 감독도, 이등 선수도, 이등 팀도, 이등 팬도 없다. 그는 소속 팀 감독이나 동료를 존중하고 신뢰한다. 그와 함께 한 감독들은 전술이나 선수 기용, 선수단과의 관계, 팀운영 태도로 인해 축구계에 각종 논란을 일으킨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손흥민은 누가 감독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권위를 존중하고 주어진 전술과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골과 승리에 대해선 동료의 공을 먼저 꼽았고, 실수와 패배에 대해선 자신의 책임을 앞세웠다.

그는 상대를 존중하며 팬을 경배한다. 유럽 무대에서 그는 종종 인종차별의 대상이 됐지만, 실력이 어떻든 상대에 대해선 최대한의 예의를 갖춘다. 그는 국적과 지역, 인종에 따라 축구팬을 차별하는 일도 없거니와, 어린이와 장애인, 환자 등 약자를 먼저 배려한다. 그라운드를 벗어나면 그의 발은 잠시 쉬어도, 팬들에 사인하고 인사하는 그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손흥민의 말은 예의와 품위가 있지만 뜻이 분명하고 의도가 정확하다. 과공비례의 덕담도, 하나마나한 허언도 없다. 이강인과의 불화설과 사과 후 손흥민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입장문은 단적인 사례다. 손흥민의 짧은 SNS글은 논란의 사태 원인과 진단, 처방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매우 정돈된 언어로 보여줬다. 손흥민의 발언은 겸손하되 자부심이 있고, 반성하되 비난이 없으며,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되 권한과 능력 또한 갖추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어떠한가. ‘내로남불’은 정치인의 생존전략이 된 지 오래다. “공은 내게, 잘못은 남에게”는 정치인의 필수 덕목이 됐다. 상대당과 상대당의 지지자들을 모욕하기 일쑤다. 유권자를 경배하기는 커녕, 매표와 갈라치기 대상으로 삼는다. 조롱과 혐오, 증오의 언어가 입에 붙었다. 정치권엔 사리분별이 되지 않는 부정확하고 불명확하며 무례한 말들로 넘친다. 우리 정치는 품위가 없다.

손흥민의 리더십에서 배워라

“Kill kill kill!” “Devi morire!” “Que se muera!” “Tuez-le” “Mach ihn nieder!”. 갈레아노는 축구장에서 관중들이 쏟아내는 “죽여버려!”라는 뜻의 응원구호를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나열하며 “축구는 전쟁의 형식적 승화”라고 규정한다.

그라운드 위에서의 축구가 ‘전쟁’이라면, 입단·이적·중계·광고·마케팅 등은 그라운드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축구이며, 그것은 ‘외교’에 비견될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월드 클래스의 기량’이라면 전쟁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계 최강급의 국방력이다. 그라운드 바깥의 축구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리더십과 인화력, 인간적인 매력이 중요하다. 외교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국제사회에서의 선도적인 의제 제기와 다양한 국가 그룹에서의 주도적 역할 등이 필요할 것이다.

리더가 리더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집단을 대표해 나간 자리에서 당당하고 능력있는 모습으로 선도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할 때이다. 과연 우리 정치지도자들 중 손흥민같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이가 얼마나 있을까.

손흥민은 지도하고 통솔하되 군림하지 않는다. 손흥민은 팀원 중 축구와 팀전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가장 솔선해서 수행하는 유능하고 현명한 리더이다.

마지막으로, 손흥민은 여전히 성장한다. 훌륭한 리더는 자신을 ‘완전태’로 여기지 않는다. 구성원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따라오라’고 하는 법도 없다. 그런 리더는 조직을 정체·퇴보시키고 구성원들을 분열시킨다. 스스로 변화하고 성장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 지도자와 구성원, 공동체는 모두 발전한다.

최근 정치인들이 ‘손흥민-이강인 불화설’ 논란에 대해 한마디씩 보태는 모양이다. 내 판돈 두고 하는 게임이 아니니 ‘공짜 훈수’라면 환장하는, ‘꼰대 정신’ 충만한 정치인들 아니랄까봐 말이다. 이미 당사자들 사이에 공개적으로 맺음된 일이니, 대한축구협회에서 후속대책이나 논의하는 것이 마땅하지, 정치인들이 ‘술자리 안주’ 삼아 껴들 문제는 전혀 아닐 듯 하다. 나이를 들먹이는 것도 영 마땅치 않지만, 굳이 빗대 말하자면 스물 몇 살 먹은 젊은 축구 선수의 인성을 논하기에 앞서 수십살이나 더 많은 정치인들 스스로의 직업적 삶에서나 부끄러울 일 없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손흥민의 축구에, 손흥민을 향한 국민적 신뢰와 기대에, 정치인 스스로를 비춰보고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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