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을 만큼 때려도 된다” “여자 옷 벗겨라”…참혹한 5·18 참상 또 드러났다

MBC 5.18 특집 다큐멘터리 '나는 기억한다' 한 장면 [MBC 유튜브 갈무리]

[헤럴드경제=박세정 기자] 5·18 민주화운동 기간 수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했다는 정부 조사 결과가 또 한번 나왔다. 피해 규모는 사망 166명, 행방불명 179명, 부상 2617명에 달한다.

사망자 10명 중 8명은 총상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사망자 10명 중 7명은 10~20대 미성년자, 청년층이었다. 특히 계엄군으로부터 ‘죽지 않을 정도로 폭행해도 무방하다’, ‘여자들의 옷을 탈의시킬 것’ 등의 지휘가 하달됐다는 증언도 나왔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는 2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5·18 보고서를 발표했다.

조사위는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광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 희생된 민간인 166명을 5·18 공식 사망자로 확인했다.

조사위는 166명에 달하는 사망자의 개별 사망 경위를 처음으로 확인했고, 희생자 개개인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이번 작업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83명의 사인과 장소 등 사망 경위가 새롭게 규명됐다. 사인은 총상이 135명으로 81.3%에 달했다. 구타 등 둔력에 의한 사망 17명, 차량에 의한 사망 12명 등이 뒤를 이었다.

5월 19일 최초의 총상 사망자 등 다수가 계엄군의 M16 총격에 의해 숨졌으나, 카빈총에 의한 사망으로 바뀐 사실이 규명됐다. 카빈총은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계엄군에 맞서기 위해 시민군이 들었던 예비군 총기였다.

날짜별 사망자는 도청 앞 집단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이 40.4%(67명)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장소는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배치된 전남도청과 금남로 37.3%(62명),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던 주남마을(12.7%) 및 송암동(12%) 등 순으로 확인됐다.

연령대는 20대 38.6%(64명), 10대 34.9%(58명) 등으로 전체 사망자의 73.5%가 미성년자와 청년층에 집중됐다.

[헤럴드DB]

이와함께 조사위는 5·18 행방불명자의 규모를 피해보상 등 기존의 절차에서 인정된 76명보다 2배 이상 늘어난 179명으로 확정했다.

5·18보상심의위원회에 피해보상 신청을 한 242명의 가족 또는 인우보증인 등을 면담하고, 기록을 재검토해 242명 가운데 53명은 5·18과 관련성 없다고 확인했다. 나머지 105명에 대해서는 암매장지 발굴 등과 연계한 지속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행방불명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1명의 신원과 소재도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된 무명열사 가운데 1명으로 확인했다.

또 인정자 2명의 소재를 5·18묘지 무명열사 묘소에서 추가로 확인, 1980년 당시 행방불명자의 암매장 가능성을 더 높였다.

아울러 계엄군 등 공권력에 의한 상해와 후유증, 상이 후 사망 등 부상자 규모는 2617명으로 분석됐다. 5·18 부상자는 첫날인 5월 18일 가장 많이 발생했다. 5월 18일 하루 동안 전체 부상자의 18%에 달하는 442명이 다쳤고, 20일까지 사흘간 발생한 부상자는 전체의 약 50%(1227명)를 차지했다.

18일부터 20일까지 부상자들의 상해 부위는 58%가 머리와 얼굴, 목에 집중됐다.

특히 전체 부상자 가운데 14%에 달하는 337명은 총상을 입었다. 대검 등 도검류에 의한 자상 피해 사례도 상당수 확인됐다. 부상자에는 여성 165명, 13세 이하 어린이 32명, 60세 이상 노인 11명 등도 포함됐다.

부상 장소에는 시위와 관련 없는 505보안부대(68명), 광주교도소(55명) 등도 포함돼 고문 등 가혹행위로 상해를 입은 사례가 확인됐다.

조사위는 면담에 응한 계엄군으로부터 '죽지 않을 정도로 폭행해도 무방하다', '여자들의 옷을 탈의시킬 것' 등의 지휘가 하달됐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전체 부상자 가운데 113명은 후유증으로 사망했는데, 상해 후 생존 기간은 7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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