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뇌혈관전문 명지성모병원에 지난 11일 119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이송하고 있는 모습 [연합] |
[헤럴드경제=이민경·안효정 기자] 전공의들이 수련병원에서 이탈한 지 4주차가 되어가고 있지만 의료계 내부에 정부와 협의할 대표성 있는 대화 창구가 없어 제대로 된 협상이 진전되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정부와 의료계의 소모적인 갈등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면서 애꿎은 환자들만 수술 일정이 일방적으로 취소되며 피해를 겪고 있다.
14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최근 정부는 의사집단 내 여러 단체와 접촉하며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서 ‘필수의료 해결을 위한 제도적 방안’을 주제로 한림원탁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박민수 복지부 2차관과 김성근 가톨릭대 의대 교수(의협 비대위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홍윤철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한희철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부원장 등이 참석했다.
하지만 여전히 평행선 대치가 이어졌고,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다. 김 교수는 필수의료 문제를 해결하려면 의료수가 정상화, 법적 부담 완화, 인력확보 정책, 취약지 의료기관 지원 확대가 필수의료 회생을 위한 선결 조건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통계청의 인구추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매년 의사 정원을 1000명 늘리는 것을 가정해 의사 수급을 분석한 결과 2035년에는 부족하지만 2050년 이후는 부족이 완화하거나 과잉 공급될 것으로 진단했다. 그러면서 의사 수급이 부족한 비수도권에만 의대 정원 확대를 국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 차관은 내년부터 2000명을 늘려야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는 기존 입장을 강조했다.
그 전날인 12일에도 박 차관은 응급의료 현장 의료진과의 간담회를 가졌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도 지난 11~12일 연속 전공의들과 만나서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역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정부와 의사 양측 모두 각자가 주장하는 증원 규모에 한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고 있어 좀처럼 대화의 물꼬를 트지 못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의사업계 내부에서도 어느 누구도 대표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점이 문제다. 서울대 의대 교수협 비대위가 정부에 전공의가 참여하는 대화협의체 구성을 제안하자, 전공의 단체는 곧바로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의사는 동질하지 않은 집단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해석이 나온다. 대형병원과 중소병원, 필수과와 비필수과, 전공의, 의대 교수, 개업의 등 의견과 이해관계가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의료계 의견 구심점이 세워지지 않으니 정부 역시 협상 파트너를 정하기 어렵게 됐다.
피해를 보는 것은 환자들이다. 암 환자와 같은 치료가 급한 중증 환자들 사이에선 기약 없이 수술 일정을 기다리며 병원 밖으로 내몰렸다는 호소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전공의들의 빈 자리를 채우고자 상급종합병원에 군의관과 공중보건의사(공보의)를 파견했지만 의료공백을 메우고 환자들의 기다림을 달래기에는 부족하다.
갑상선암 3기 환자인 60대 A씨는 지난달 말 병원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수술 일정 취소 통보를 받았다. A씨는 로봇 수술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병원 측은 A씨에게 로봇 수술 대신 방사선 치료를 권했고, 그마저도 5월부터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A씨는 “암 환자에겐 1분 1초가 ‘골든타임’과도 같은데 예정된 수술일을 미뤄버리면 불안해서 어떻게 살겠느냐”며 “정부와 의료계가 서로 양보하지 않고 싸우다 보니 애먼 암 환자들과 보호자들만 속이 탄다”라고 말했다.
A씨는 그러면서 “전쟁이 나도 다친 사람은 치료해 주지 않느냐. 지금 대한민국에서 정말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분개했다.
70대 암 환자 B씨도 전공의들의 집단사직 이후 입원이 중지되면서 항암치료를 예정일보다 10여일 후 받았다. CT 판독 결과 암 세포는 췌장 내부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B씨는 “입원 일정이 연기되지 않고 치료를 제때 받을 수 있었다면 전이를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폐암을 앓고 있는 60대 환자 C씨 역시 2월에 잡혀있던 수술 일정이 이달 말로 연기됐다. C씨는 다가오는 수술 날짜를 기다리는 내내 편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암 환자가 병원의 퇴원 압박을 받고 요양병원으로 옮겼다가 다음 날 바로 사망한 사례도 있었다. 한국중증질환연합회에 따르면 70대 암 환자인 E씨는 작년 10월 담도암 진단을 받고 서울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하지만 전공의 집단이탈이 본격화한 지난달 20일부터 병원의 퇴원 압박이 시작되면서 결국 E씨는 반강제로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겼고 다음 날 새벽 4시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중증질환연합회는 지난 11일 “가장 보호받아야 할 중증 질환자들이 정부와 의료계 양쪽의 갈등 상황에서 이들 사이의 협상 도구로 전락해 볼모가 되고 있다”며 “정부는 필수의료 패키지 추진을 멈추고 의사들은 환자 곁으로 돌아와 이 파렴치한 상황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