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신분제는 어떻게 사라졌나…의대 정원 증원 사태에 붙여[취재메타]

‘반상도(양반과 상민)’, 김득신, 평양조선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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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귀족과 평민을 구분하는 신분제가 공고히 유지되려면 귀족의 수는 늘 적게 유지돼야 한다. 노동하지 않는 귀족이, 생산에 종사하는 평민보다 수가 많아지면 체제 유지가 어렵다. 우리 역사에서도 신분제는 사라졌다. 조선 500년간 유지됐던 신분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공식 폐지됐다. 그럼에도 국민 모두는 양반이 되고 싶었고, 이 때문에 족보를 사고 파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조선 초 인구의 약 7%였던 양반이 조선 후기엔 약 70%까지 늘어났다. 덕분에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도 신분제 개념이 지워지게 됐다.

역사를 답습해 현대 한국에서도 기득권으로 분류되는 직업 또는 직능이 대두될 때마다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대응으로 ‘증원’이 늘 거론된다. 기득권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그 희소성이 퇴색된다는 것이 학습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새로운 ‘지배계층’의 출현을 막는 것이라기 보다는, 문턱을 낮춰 더 많은 시민이 의료 서비스, 법률 서비스 등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탄탄히 깔고 있을 때 대중적 지지를 받는다.

2024년은 의사의 해다. 정부는 지난 20일 2000명에서 단 한 명도 줄이지 않고 의대 증원에 쐐기를 박았다. 한 달을 넘게 끌어온 의-정 갈등이 9부능선을 넘어섰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날 교육부의 공문을 받은 각 대학은 늘어난 정원을 반영해 수시모집과 정시모집 비율 및 전형방법을 결정한다.

게다가 증원이 서울 지역에는 한 명도 없고, 전부 수도권과 지방국립대에만 배정됐다. 파업을 주도했던 수도권 빅5 전공의와 사직을 결의한 서울권 의대 교수들의 집단행동 동력이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는 기존 의료계가 겪어보지 않은 유형의 충격이다. 그동안 의협 지도부뿐만 아니라 수련병원의 전공의들을 비롯해 의대생들도 집단 휴학으로 정부에 맞설 수 있는 배경에 대해 많은 의료계 인사들은 “(의사들이)한번도 져본 적 없다는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의대 증원을 찬성해온 국민들 다수는 2000명을 꽉 채운 이번 확대 정원 발표가 ‘의사들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패하는 첫 선례’로 이어질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환자들을 내팽개치고 병원을 이탈한 전공의들은 비판 여론에 아랑곳없이 ‘병원 그만두고 쿠팡 알바 하는 중’이라고 우스개소리를 하거나, ‘판·검사는 수학 포기한 바보들’, ‘제가 있고 환자가 있다’는 등의 비아냥대는 언사를 이어갔다. 병원에 남은 전공의들과 수업을 계속 받는 의대생들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추후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도 일반 시민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박명하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조직강화위원장은 “보조 수사관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껌을 뱉어라’고 하는 등 부당하게 압박하고 강압 수사를 했다”며 수사관 기피 신청서를 냈다.

의사, 의대생을 제외한 절대 다수의 시민들은 이 광경에 ‘천룡인(모든 법 위에 군림하는 귀족) 납셨다’며 비판했다. 의사들이 자기 직업 외의 사람들을 돌아서게 만든 바람에 정부의 속전속결 의대 증원은 여론의 힘을 얻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금의 의대 정원 증원 사태가 있기 전, 변호사·판사·검사가 속한 법조계가 이 단계를 먼저 거쳤다. 2008년에 도입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은 25개 대학에 설치돼 다음해 2000명의 입학생을 받았다. 2012년 첫 졸업생이 배출되면서 법무부는 1회 변호사시험 합격률을 ‘입학정원 2000명 대비 75%’로 잡았다. 1500명의 로스쿨 변호사가 신규 유입된다고 알려지자 2012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41기 연수생 약 1000명에 더해 법률시장이 ‘공급과잉’ 상태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 쏟아졌다.

뿐만 아니라 법무부가 당시 ‘로스쿨 학생 중에서 원장이 추천하는 우수생을 우선적으로 검사로 임용하겠다’고 방침을 내놓자 사법연수생들은 입소식 참석 거부와 성명서 발표라는 사상 초유의 ‘집단행동’에 나섰다. 연수원 출신 선배 변호사들도 힘을 실었다.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일컬어 ‘로변’이라며 연수원 출신 변호사와 급을 나누는 행태가 지속됐다. 또, 변호사 숫자를 늘려봤자 서울 쏠림만 심화될 것이라는 비관도 제기됐다.

하지만 1기 졸업생 배출 이후 11년이 흐른 2023년 기준, 지방 변호사 수도 전체 변호사 증가에 비례해 늘어났다. 현재 의대 증원 국면에서도 비수도권 의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결국 다시 수도권으로 모여, 의료 서비스의 수도권 쏠림 현상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란 비슷한 지적이 나오고 있는 바, 법조계 선례가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변호사가 상대적으로 흔해지면서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법률전문가인 변호사들을 고용할 수 있게 됐다. 경찰을 비롯해 공무원 조직에 변호사들이 특채로 임용되고 있고, 일반 사기업은 사내 변호사를 뽑아 법무팀을 구성한다. 언론사에도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기자들이 유입됐다.

또, 변호사들이 과거 사법시험만 존재하던 때처럼 모두 엄청난 연봉을 벌어들이진 못하지만 여전히 일반 직장인에 비하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변호사시험 1회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일반 회사에 다니다 변호사가 되고 10년 가까이 일을 하다보니 왜 그렇게 전문직 진입장벽을 높이려고 했는 지 알겠다”며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현재도 변호사 벌이는 일반 직장인에 비하면 훨씬 높다. 의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귀띔했다.

의사도 그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수입이 많이 줄어들 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오히려 정부가 기피과(필수과)에 혜택을 주겠다고 공언한 만큼 해당 과 의사들은 더 조건이 좋아질 수 있다.

정부는 21일 오후 처우 개선 토론회를 열어 전공의 달래기에도 나선다. 이미 의대 증원 계획 백지화가 물 건너간 가운데 정부는 연속 근무 시간 단축 등 환경 개선에 집중해 전공의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달부터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들에게 매달 100만원씩 수련비용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분만, 응급 등 다른 필수의료 과목 전공의들까지 지원할 수 있도록 대상 범위를 조속히 확대할 계획이다.

아울러 올해 상반기에는 전공의 연속 근무시간 단축 시범사업을 실시하고, 80시간인 일주일 최대 근무시간도 줄이는 방안을 검토한다. 하반기에는 수련환경을 파악하기 위한 실태조사도 하고, 수련환경평가위원회에 전공의의 참여를 늘린다. 토론회에는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 외에 임인석 중앙대 교수 등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임 교수가 복지부 장관 직속 기구인 전공의 수련환경평가위원회의 기관평가위원장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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