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송금” 보증금 일부만 돌려주고 세입자 내보낸 집주인…대법, 무죄 취지로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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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1일 이체한도 핑계를 대며 세입자를 속여 전세보증금의 일부만 돌려준 뒤 내보낸 집주인을 사기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사기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의 ‘재산상 손해’가 있어야 하는데, 세입자의 오피스텔 점유권 이전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긴 어렵다는 이유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노태악)는 사기 등 혐의를 받은 A(38)씨에 대한 사건에서 이같이 판시했다. 2심은 A씨의 모든 혐의를 유죄로 봤지만 대법원은 “이 부분을 유죄로 인정한 건 잘못”이라며 다시 판단하도록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임대인 A씨는 피해자와 2018년 4월, 서울 영등포구의 한 오피스텔 호실에 대해 전세 계약을 맺었다. 보증금은 1억 2000만원이었다. 이후 2020년 8월, 계약 해지 시점에 A씨는 피해자에게 7000만원은 돌려줬지만 나머지 5000만원은 돌려주지 않았다.

당시 A씨는 “1일 이체 한도가 5000만원”이라며 “남은 보증금은 3일 뒤 돌려주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믿은 피해자는 짐을 뺀 뒤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려줬지만 A씨는 끝내 남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다. 대신 이 돈을 본인의 빚, 신용카드 대금 등을 갚는 데 사용했고, 또 다른 세입자와 전세계약을 맺었다.

결국 A씨는 형법상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A씨에겐 해당 혐의뿐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에 대해 5년에 걸쳐 32억원 상당의 투자 사기, 사모펀드 사기, 주식 단기투자 사기 등을 저지른 혐의가 적용됐다.

1심은 징역 5년을 선고했다.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 25-2형사부(부장 박정제)는 지난 4월, A씨의 모든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재판 과정에서 A씨 측은 전세보증금 관련 혐의를 부인했다. A씨는 “임대차계약의 종료에 따라 오피스텔을 반환한 것은 임차인의 의무”라며 “이를 사기죄의 구성요건인 재산적 처분행위라고 볼 수 없고, A씨가 얻은 재상상 이득액도 없어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채무 불이행이라는 취지였다.

1심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임대차보증금 전액을 반환받을 수 없는 상황임을 피해자가 알았다면 오피스텔 점유권을 이전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A씨가 피해자를 속여 피해자가 점유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됐으므로 사기죄가 성립하는 게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이어 나머지 사기 혐의도 유죄를 인정하며 “피해자들을 상대로 고수익을 보장하겠다고 속여 31억 7100여만원을 상당을 편취해 죄질이 나쁘다”며 “피해자들에게 21여억원을 지급해 피해가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2심의 판단도 같았다. 2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13형사부(부장 김우수)는 지난해 11월, 1심과 같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A씨가 아직도 피해자에게 잔여 보증금 5000만원을 반환하지 않고 있다"며 “피해자는 오피스텔에서 계속 점유할 권리가 있음에도 A씨의 기망 행위로 점유를 이전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하급심(1·2심) 판결을 깼다.

대법원은 “피해자가 A씨의 말에 속아 점유권을 이전했더라도, 이를 재산상 이익을 처분했다고 볼 수 없다”며 “사기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사기죄가 재산 범죄인 이상 피해자가 본인의 재산에 직접적인 손해를 입어야 하는데, 점유권 이전을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피해자에 대한 사기 부분을 파기하는 이상 경합범 관계에 있는 나머지 범죄에 대한 원심(2심) 판결도 전부 파기돼야 한다”며 “다시 판단하도록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돌려보낸다”고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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