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내 빈 철로 모습.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 [뉴시스] |
[헤럴드경제=서재근 기자] 미국이 중국 국영 열차제조업체 중처그룹(CRRC)과 맺은 철도차량 도입 계약을 수년째 이어진 납기 지연과 잦은 결함을 이유로 전면 철회했다.
15일 미국 현지 매체 등에 따르면 지난 12일(현지시간) 펜실베니아주 남동부 교통당국(SEPTA)은 성명을 통해 지난 2017년에 CRRC와 맺은 1억8500만달러 규모의 2층 전동차 45량 도입 사업 계약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사유는 품질 문제와 그로 인한 지속적인 납기 지연이다. 해당 프로젝트는 예정보다 이미 약 4년 정도 지연된 상태로 초도 물량조차 납품되지 않았다. 이미 프로젝트에 지출된 50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회수하기 위한 조치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은 이미 지난 2022년 1월에 생산 중인 CRRC 차량 내부 패널과 전기 배선, 안전과 직결된 비상구 창문 등에 결함이 발견됐으며 제동장치 시험에서도 반복적으로 통과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미국 정부의 결정과 관련해 현지에서 커지고 있는 저가 중국산 철도차량에 대한 반감은 더욱 확산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 CRRC는 막대한 자국 보조금을 앞세워 미국을 포함한 해외 시장에서 초저가 응찰로 시장 점유율을 높여왔다. 이번에 취소된 계약 건 역시 CRRC가 경쟁사인 캐나다 봄바르디어보다 3400만 달러나 낮은 가격을 써내 논란이 불거졌다.
지난해 미국 교통부 감사관실은 CRRC가 ‘바이아메리카 법’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 조사에 착수했다. 이 규정은 외국 기업이 제작하는 철도차량은 부품 70% 이상이 미국산이어야 하며, 최종 조립도 미국에서 완료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특히 2019년 12월에 미국 상하원 군사위원회는 ‘국방법안(NDAA)’ 절충안에 합의하기도 했다. 국가 보조금을 사용해 저가 공세로 시장을 교란하는 중국 기업들이 자국 내 교통 산업 조달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중국 제품이 미국의 주요 인프라와 경제, 군사 등 국가 안보에 위협을 끼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제재 기업 명단에는 CRRC가 포함됐다.
국내에서도 해외 업체의 시장 교란을 차단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재 한국철도공사(코레일)를 포함한 국내 주요 철도차량 발주처들은 최소한의 기술 점수만 넘기면 최저가 응찰 기업이 사업을 수주해 사실상 최저가 입찰제도라 불리는 ‘2단계 규격가격 분리 동시 입찰제’를 대부분 활용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제도가 아무런 규제 없이 국제 경쟁 입찰을 실시하는 만큼 낮은 가격만 앞세운 저품질 철도 차량 도입 등 부작용이 뒤따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유럽은 자체 규격 규정인 ‘TSI(Technical Specifications for Interoperability)’라는 규제 장벽을 두고 있다. TSI는 유럽 내 운영되는 철도의 상호 호환성을 만족하기 위한 요건들을 정한 것으로 설계나 건설, 개량, 개조, 운영 및 유지관리, 안전 요건 등은 물론 차량에 들어가는 세부 부품 규격까지 포함돼 있다. 튀르키예나 사우디아라비아 등 비(非)유럽연합(EU) 국가들도 TSI 만족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CRRC는 지난 3월 불가리아 철도차량 유지보수 입찰 사업 참여 계획을 철회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앞서 지난 2월 내수 시장을 왜곡하는 수준의 역외보조금을 받아 해당 사업에 지나치게 낮은 응찰가를 제시했다는 의혹으로 CRRC에 대한 ‘역외보조금규정(FSR)’ 심층 조사를 착수한 바 있다.
전 세계 철도차량 시장 점유율 1위인 중국 역시 철도차량 입찰 참여 시 자국법인과의 공동응찰을 의무화한 것을 비롯해 완성차는 70% 이상, 전장품은 40% 이상의 자국 부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철도산업은 국가기간산업이라는 점 외에도 국가 안보와 직결된 핵심 교통수단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미국과 EU는 물론 중국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해당 분야에서 저가 제품의 무분별한 진입을 막고, 장벽 세우기에 집중하는 것 역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