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임윤찬 [유니버설뮤직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찬란하고 찬연하다. 새파란 하늘 곳곳의 틈 사이로 눈부신 음표들이 폭포(쇼팽 에튀드 10-1)처럼 쏟아졌다. 제 자리에 안착하는 소리들은 공간이동을 하듯 지구별 너머 어딘가로 향하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 앉는다. 임윤찬의 쇼팽은 “음표 너머의 이야기를 찾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음표 뒤에는 항상 숨겨진 내용이 있는데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했던 유명한 이야기가 있어요. 저도 그것을 찾기 위해 해야할 것을 했어요.”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이정표이자 변곡점인 피아니스트 임윤찬(20)이 세계적인 레이블 데카(Decca)를 통해 첫 스튜디오 앨범 ‘쇼팽 : 에튀드(Chopin: Études)’를 세상에 내놨다.
앨범 발매에 맞춰 19일 오전 진행한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임윤찬은 “10년 동안 내 안에 있었던 용암을 이제서야 밖으로 토해낸 느낌”이라고 말했다.
임윤찬은 첫 스튜디오 데뷔 앨범을 내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그가 사랑하는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1901~1961)의 말을 인용, ‘진정 위대한 예술은 일곱 겹 갑옷을 입은 뜨거운 용암과도 같다’는 말을 적었다. 그러면서 “제 앨범을 들으시는 분들에게도 이 음악이 일곱 겹 갑옷을 입은 뜨거운 용암과도 같길 바란다”고 적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유니버설뮤직 제공] |
쇼팽이 에튀드를 쓰기 시작한 나이는 19세다. 임윤찬이 이번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한 무렵과 같은 나이다. 그는 “이그나츠 프리드만, 소프로니츠키, 호로비츠와 같은 훌륭한 연주자들의 음악을 듣고 (나도) 녹음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며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 지금 나이에 이 산을 꼭 넘고 싶다는 의지에 영감을 받아 음반을 녹음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 하루 평균 여섯 시간씩 연습하나, 앨범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엔 하루에 12시간씩 피아노 앞에 앉아있기도 했다. 악보와 악보 너머의 이야기에 파고들 때, 그의 손에 함께 들렸던 것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가 쓴 ‘쇼팽을 찾아서’였다. 코르토는 쇼팽의 마지막 제자인 에밀 데콩브를 사사했다. 임윤찬은 “교육자로의 쇼팽, 그의 외모와 연주, 말년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을 통해 모르던 부분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음반엔 ‘쇼팽:에튀드’ 10번과 24번 연습곡 24개가 담겼다. 10번은 1833년에 출판된 곡으로 고도의 연주 기술과 깊은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4년 뒤 출판한 25번 역시 높은 난도로 풍부한 표현력을 요구한다. 각각의 곡들은 개성이 강하고 독립된 예술작품으로 자리한다. 임윤찬은 “한 곡의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한 다음 어떻게 연습해 나아갈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녹음 과정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쇼팽의 악보와 그것을 해석하는 임윤찬의 창의적 시도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일이었다. 이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준 일등공신은 프로듀서 존 프레이저였다. 임윤찬은 “처음 녹음 당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막 쳤는데, 쇼팽이 남긴 텍스트에서 너무 벗어났다 싶을 때는 프레이저 디렉터가 잘 잡아줬다”며 “덕분에 밸런스를 맞춰 녹음할 수 있었다. 스튜디오 음반의 장점은 하고 싶은 것을 여러 번 시도한 뒤 마음에 드는 걸 골라낸다는 점이었다. 덜 긴장한 상태에서 기분 좋게 끝냈다”고 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유니버설뮤직 제공] |
임윤찬의 쇼팽은 수천, 수만 번 건반을 누르고 매만지고 이어낸 후에야 하나의 곡으로 완성된다. 그에게 가장 까다로운 곡은 에튀드 작품번호 25번 제7번 ‘첼로’였다. 이 곡은 보통의 피아노곡과는 다른 연주를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왼손이 반주를, 오른손이 선율을 연주하는 것과 달리 오른손이 반주를 맡고 왼손이 첼로처럼 낮은 음역으로 선율을 만들어간다.
임윤찬은 “가장 까다로우면서도 연주의 즐거움을 준 곡이다. 곡의 서사가 첫 음부터 마지막 음까지 이어지는데 첫 두 마디에 내 감정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며 “이 두 마디를 완성하기 위해 7시간을 연습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첫 음을 누를 때 심장을 강타하지 않으면 연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솔 샵을 누르는 순간 심장을 강타해야만 다음 음으로 넘어가고, 그 다음 음에서 심장을 강타하지 못하면 다시 그 한 음을 계속해 연습한다. 마침내 심장을 강타할 때 두 음을 연결해 연습하고, 두 음을 연결해 연습할 때 심장을 강타하지 않으면 계속 반복해 두 음을 연습한다”고 했다. 이 곡을 녹음하는 데엔 무려 4일이 걸렸다.
작품번호 25번 제9번 ‘버터플라이 윙스’에선 파격의 시도가 나왔다. 그는 “이그나츠 프리드만이 이 곡을 연주하며 왼손에서 완전히 다른 음을 치는데 그 음들이 무척 매력적이었다”며 “이번 녹음에서 왼손 음을 바꿔 쳐봤다. 존 프레이저 디렉터는 다른 음을 치면 귀신같이 잡아내는 분인데, 이 음들은 ‘매력적이고 굉장히 특별한 왼손’이라고 해주셔서 그대로 담게 됐다. 재밌게 들으실 수 있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유니버설뮤직 제공] |
임윤찬의 쇼팽은 그가 사랑해 마다 않는 20세기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존경과 그 안에 새겨진 그 시대 음악에 대한 지향이 채워져 있다. 그는 “알프레드 코르토, 이그나츠 프리드만, 요제프 레빈, 마크 함부르크, 세르지오 피오렌티노 등 내게 거대한 우주 같은 피아니스트들이 쇼팽 에튀드를 연주해 왔다”며 “어릴 때부터 이들처럼 근본 있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 쇼팽을 선택했다”고 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깊이 깔려있어 두려움 없는 표현을 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예측불가능한 타이밍에 가볍게 던지는 유머가 있는 음악가, 한 음을 치자마자 귀가 들을 시간도 없이 심장을 강타하는 음악가를 근본 있는 음악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이런 점들은 노력으로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시대가 내린 천재들, 축복받은 사람들만이 하는 건데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매일매일 연습하면서 진실되게 사는게 중요할 것 같아요.”
2022년 제16회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사상 역대 최연소 우승자로 이름을 올린 이후 임윤찬은 가파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콩쿠르 당시를 떠올리며 “그 때는 진짜 내 모습이 아니었다. 콩쿠르라는 힘든 환경에 너무 딱딱해져 있었고, 스스로 갇혀있었다”며 “지금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하고 무대에서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현재 미국 뉴잉글랜드음악원에 재학 중인 임윤찬은 지난해부터 촘촘하게 이어지는 해외 연주 일정으로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최근엔 손에 무리가 와 공연 일정을 모두 취소하기도 했다. 그는 “1~2주를 쉬니 손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피아노를 치는 데에 지장이 없다”고 했다. 오는 25·26·28일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심사위원장이었던 마린 알솝이 지휘하는 미국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으로 다시 공연을 시작한다. 국내에서는 6월부터 전국 리사이틀 투어를 갖는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바뀌었어요. 제 음악은 달라져야만 해요. 제 입으로 이야기하긴 그렇지만, 좋게 변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