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유출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 ‘디스커버리(증거공개) 제도’가 주목받고 있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송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전에 당사자가 증거를 미리 교환하는 절차다. 미국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23일 헤럴드경제 취재를 종합하면 법조계 관계자들은 기술 유출 재판의 핵심으로 ‘증거 확보’를 꼽았다. 일단 기술 개발이 완료되고 나면 어떤 기술이 유출돼 어떻게 사용됐는지 역추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술 유출 정황이 발견되면 자체 디지털 포렌식 등을 통해 실제 기술 유출 시도가 있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관건이다.
때문에 국내 기업은 형사 절차를 우선 개시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이 자체적으로 확보하거나 민사 소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거의 없어, 압수수색 등 수사 권력의 힘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해외 유출이 늘어나면서 증거 확보 어려움과 증거 인멸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기술 유출·침해 의심이 들 경우 민사 소송을 우선 제기한다. 변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앞서 유출 의심 기업에게 인력 채용 과정, 면접 질문, 채용 이후 담당 업무와 작성 보고서 등을 증거로 신청해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 개발이 완료된 상태라면 기술이 적용된 제품의 도면도 요청할 수 있다. 증거를 교환하면 어느정도 소송 결과가 예상돼 재판 이전에 합의가 이뤄지기도 한다.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의 경우 증거 공개 절차와 기한을 정해뒀다. 우선 증거개시계획을 진행한 뒤 14일 이내에 정보 소지자를 공개해야 한다. 변론일 90일 전까지 감정인 공개, 30일 전까지 예상 증인 공개도 해야 한다. 증거개시 절차에 응하지 않을 시 강력한 제재 수단도 함께한다. 법원이 증거 공개를 명령했는데도 위반할 경우 명령에 포함된 내용을 사실로 간주하거나 패소 판결도 내릴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재판부가 소송 당사자에게 ‘문서제출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위반했을 경우 제재 수단이 부족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백창원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피해 기업이 기술 유출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가 막혀있는 상황에서 디스커버리 제도는 유용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며 “다만 재판 과정에서 영업비밀이 유출되거나 디스커버리 제도를 악용해 기술을 탈취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당초 디스커버리는 전반적인 민사 재판 지연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국내에서 논의됐다. 증거 공개 과정에서 영업비밀 침해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기술 유출 사건이 급증하면서 국내 상황에 맞게 수정한 ‘한국형 디스커버리’로 기술 유출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박형남 사법정책연구원장은 “민사 소송이든 형사 소송이든 기술 유출을 판단하고 피해 규모를 산정하게 위해서는 투명한 정보와 증거 공개가 필수다. 기술 유출뿐 아니라 민사 소송에서 디스커버리는 중요한 문제”라며 “공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제3의 기관에게 감정 받아 가치를 산정하는 방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