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만난 코미디…“장례식장 같은 공연장…유머가 필요했다” [인터뷰]

피아니스트 주형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오늘은 이 곡을 장조로 연주할 수 있겠어?”

한껏 심취해 ‘터키행진곡’을 연주하던 피아니스트 주형기와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세이 이구데스만(Aleksey Igudesma). 꽤나 마뜩찮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주형기는 단조의 ‘터키행진곡’을 “A장조로 연주해보라”고 제안한다. 황당한듯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는 이구데스만. 이내 활 시위를 치켜든 그는 금세 화사한 선율로 음악을 뒤바꾼다.

엄숙하기만 하던 클래식 연주회가 ‘유머’를 입었다. 피아니스트 주형기의 무대는 한눈 팔 겨를이 없다. 모차르트 교향곡 사이로 영화 ‘제임스 본드’가 끼어들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다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를 부른다. 난데없이 피아노 밑에 들어갔다 머리를 쿵 찧으면 객석엔 웃음이 전염된다. 익살스러운 표정과 과장된 그의 미소는 무언극 속의 광대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에서의 공연을 앞두고 서울 인사동의 한 호텔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주형기(51)는 “음악과 유머는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며 웃었다.

주형기는 클래식 음악계의 ‘기인’이다. 이미 20년 전이었던 2004년, 파격적이고 신선한 무대를 클래식 공연장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영국 예후디 메뉴인 학교에서 만난 이구데스만과 함께 듀오로 선보인 ‘악몽같은 음악(A Little Nightmare Music)’이라는 콘서트였다.

“클래식 공연장의 관객들은 너무나 폐쇄적이고 위축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음악을 들으며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장례식에 와있는 것 같았죠. 관객들의 모습을 보니 전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공연장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어요.”

피아니스트 주형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오래도록 이어온 전통을 깨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주형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바그너와 말러 시대가 오면서 음악에만 집중하게 됐지 그 이전엔 달랐다”며 “리사이틀을 창시한 리스트는 연주를 하다가 관객과 와인을 마셨고, 모차르트는 16마디만 치고도 박수가 나오자 연주를 멈췄다. 베토벤 시대엔 바이올린을 뒤집어 연주할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4악장에서 연주자들이 차례로 퇴장하는 하이든 교향곡 45번 ‘고별’은 그를 고용한 후작이 하인과 악단원을 집에 보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재치있게 담아낸 곡이라고 그는 귀띔했다. 실제로 이 곡을 들은 니콜라우스 후작은 이튿날 휴가를 줬다고 한다.

주형기와 그의 절친이 만든 클래식 코미디 듀오 ‘이구데스만 & 주(Igudesman & Joo)’의 공연은 기발하고 재치있는 아이디어로 무장한다. 거꾸로 매달려 피아노를 연주하고, 신용카드를 넣어야만 음악을 연주하는 콩트를 연출한다. 텅 빈 무대를 꽉 채우는 주형기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행동에 딱딱한 분위기에 갇혔던 관객들의 마음은 금세 무장해제 된다.

일탈 같은 공연을 두고, 초반엔 “저게 뭐냐”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코미디가 가능했던 것은 그의 공연은 언제나 ‘음악’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직조한 작곡가들의 음악을 비틀어 새로운 창조를 이어가면 이곳이 ‘음악 천국’이라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그는 “웃음과 코미디는 아주 깊은 감정까지 담을 수 있는 좋은 도구”라며 “사람들이 웃게 되면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음악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피아니스트 주형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여덟 살에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의 80세 생일 공연을 함께 할 만큼 재능을 인정받았다. 스스로는 “오페라 한 편씩 써내는 천재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한다.

코미디와 음악을 접목하면서도 그는 언제나 ‘음악의 본질’을 잃지 않는다. 주형기는 “우리는 단지 음악을 가지고 코미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음악인으로의 음악성을 인정받아 초창기 많은 음악인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요요마,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액스가 주형기와 함께 공연하며 클래식의 엄숙주의를 깨왔고, 팝가수 빌리 조엘은 주형기와 협업하며 음반을 냈다.

6년 만에 찾은 한국에선 주형기의 다재다능함을 만날 수 있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음악과 코미디를 접목한 기획자로의 모습이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 초청된 그는 ‘가족음악회: 유머레스크’(4일, 예술의전당)를 통해 베토벤에 웃음을 더한 ‘쿵후 엘리제’, 베토벤과 에릭 사티를 뒤섞은 ‘엘리제를 위한 명상곡’ 등 다양한 곡을 들려준다.

페스티벌의 폐막 공연인 ‘비극의 피날레’에선 쇼숑의 바이올린, 피아노, 현악 4중주를 위한 협주곡 D장조, Op.21을 연주한다. 폐막 공연의 실내악 연주는 웃음기는 쏙 뺀 진지한 음악 연주다. 주형기는 “혼자 연주할 땐 독재자처럼 모든 것을 컨트롤 할 수 있지만, 실내악은 서로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야기하고 대화하야 한다”며 “싸우게 될지라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 실내악이다. 이 음악을 통해 연주자는 물론 청중도 대화와 경청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무대 위에서의 다양한 시도엔 주형기의 바람이 담겼다. 여러 행보는 진입장벽이 높고 관객은 고령화되는 클래식 음악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노력이다.

“클래식 음악은 공룡 같은 존재예요. 공룡은 덩치는 크고, 한 번 움직이려면 많은 힘이 들고, 그러다 결국 멸종한 존재가 됐죠. 음악과 코미디를 접목한 20년 전엔 꿈쩍도 안 할 것 같은 클래식계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요. 유머를 섞은 클래식을 통해 스포티파이로 음악을 듣던 젊은 세대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연으로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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