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네스 마틴, 무제 #9, 1990,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휘트니미술관] |
[헤럴드경제(강릉)=이정아 기자] 당신은 격하게 외로워질 용기가 있는가. 철저하게 고립된 낯선 황무지에서 세상을 완전히 등진 채 말이다.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37세의 나이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침묵만이 가득한 광활한 사막으로 수도승처럼 떠난 아그네스 마틴(1912~2004). 실제로 그는 무려 40여 년간 은둔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린 세계적 작가다. 극단적으로 단순한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그의 캔버스 화면은 정말 ‘텅 비어’ 있다.
“내 그림에는 사물도 공간도 선도 아무것도 없다. 아무런 형태도 없다. 마주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틴이 지난 1996년 세상과 단절되기 위해 미국 뉴욕에서의 작품 활동을 중단한 시점에 한 말)
완전히 사라진 조형, 희미하게 그어진 연필 자국, 모눈종이를 연상케 하는 격자, 옅은 파스텔톤 색채…. 지독한 고독을 예술의 영감으로 삼은 마틴의 작품 54점이 한국을 찾았다. 지난 2월 개관한 강원도 강릉시 솔올미술관에서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전시가 막을 올리면서다. 캐나다 출생 미국 화가인 마틴은 1960년대 미국의 모노크롬 회화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이자 200억 원 이상을 호가한 경매 최고가 기록을 가진 순수 추상화가다. 마틴 자신은 모더니즘 작가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했다.
아그네스 마틴, 아기들이 오는 곳(‘순수한 사랑’ 시리즈), 1999,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디아파운데이션] |
이번 전시는 미국 뉴욕 휘트니 미술관과 일본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 나고야시 미술관, 한국 리움미술관은 물론 미국 뉴욕 3대 갤러리 가운데 하나인 페이스 갤러리와의 협력으로 마틴의 주요 작품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마틴은 페이스 갤러리 초대 회장인 아니 글림처와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영국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명예관장이자 올해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석좌교수로 초빙된 프랜시스 모리스가 직접 전시 큐레이팅을 맡았다. 전시장에서 만난 모리스는 “마틴이라는 작가를 단순히 조망하는 전시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며 “전시 제목처럼 마틴의 ‘주요 순간들’에 주목해 본질에 다가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아그네스 마틴, 무제, 1955, 캔버스에 유채, 금속 페인트. [페이스 갤러리] |
전시는 마틴이 구상 회화를 벗어난 시점부터 출발한다. 전시장 초입에 걸린 1955년작 ‘무제’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을 보면 마틴이 처음부터 형태가 완전히 없는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대상을 재현하거나 모방하는 회화에서 벗어나 좀 더 형식적이고 기하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추상 세계로 옮겨간 것을 보여주는 작품은 1964년작 ‘나무’다. 화면을 격자로 잘게 약분한 연필 자국이 작가가 한평생 천착한 전형적인 스타일의 시작을 알린다. 모리스는 “나무의 순수함에 대해 생각하던 마틴이 마침내 격자를 떠올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마틴의 작업적 대전환을 암시하는 1973년작 ‘어느 맑은 날에’은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작품 중 하나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실크스크린 프린트 30점으로 이뤄진 이 작품은 마틴이 지난 1967년 미국 뉴멕시코주의 시골 마을인 타오스로 돌연 잠적한 이후 6년 만에 처음으로 작업한 그림이다.
사실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마틴은 편집성 조현병을 앓았다. 그가 끝내 세상을 피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택하게 된 것도 그의 지병에 따른 영향이 컸다. 마틴은 작업 활동을 중단하고 고요하게 명상하며 마음의 무게를 덜어냈다. 자기 안으로 더욱 침잠한 그가 마침내 연필을 들고 희미하게 그려나간 건, 수직과 수평으로만 뻗은 절제된 선이었다. 어떠한 사물도 없는, 방해가 없는 텅 빈 세계다. 그러나 감상자의 마음을 비춘다는 점에서 화면이 아주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마틴은 이 작품을 그리게 된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작품들은 마음의 순수함을 표현한다. 만일 당신이 이 작품들에 호응해 이 작품들만큼 고요하고 텅 빈 마음으로 자신의 느낌을 알아볼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이 이 작품에 오롯이 감응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그네스 마틴, 나무, 1964,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리움미술관] |
1977~1992년 제작된 회색의 모노크롬 회화 8점에 다다르면 작가가 화면을 지움으로써 추구한 ‘정신적 사유’가 비로소 펼쳐진다. 무채색에 가깝도록 씻겨나간 색채와 부드럽게 흐려지는 수평선은 수행자적 자세로 작업을 한 마틴표 추상 세계의 미학적 절정이다.
마틴이 생애 마지막 10년 양로원에 머물며 몰입해 그린 8점의 ‘순수한 사랑’ 시리즈는 가느다란 선과 선 사이를 채운 연분홍·연초라·연보라 등 색이 따스한 온기를 지피는 듯 서정적인 감정을 자아낸다. 작가가 마침내 마음 속에서만 영원히 전달되는, 그래서 끝내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예술의 가장 순수한 본질에 가닿은 듯 보이는 이유다. 모리스는 “‘완벽함’을 추구한 마틴은 작품의 크기, 색상, 기법 등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그 안에서 색과 선을 무한히 반복하고 변주하며 화면을 채웠다”고 설명했다.
마틴의 전시와 함께 한국의 단색조 추상 회화를 대표하는 정상화의 작품 13점이 소개되는 개인전도 열린다. 전시는 8월 25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기준 1만원.
한편 한국근현대미술연구재단이 위탁 운영을 맡고 있는 솔올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관련 업무에서 손을 뗀다. 올해 하반기부터 솔올미술관은 강릉시에 기부체납 돼 시립미술관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김석모 솔올미술관 관장은 향후 운영 계획을 묻는 질문에 “아는 바가 없다. (강릉시와) 공유되고 있는 바도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