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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국회에서 위헌·헌법불합치 법률을 개정하지 않으면서 생긴 입법 공백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법조계에선 “법의 흠결이 치유될 때까지 관련 재판은 지연될 수밖에 없고, 현장에선 혼란이 잇따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9일 기준 국회에선 34건의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법률이 개정되지 않은 채 쌓여있다. 특히 낙태죄 처벌 조항은 개정 시한이 2020년 12월까지였는데, 이미 약 3년 4개월이 지났다. 이러한 입법 공백은 재판 지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류분(상속인에 대해 법으로 보장한 최소한의 유산 비율) 제도에 관한 헌법불합치 결정이다. 헌재는 최근 패륜적 행위를 유류분 상실 사유로 규정하지 않은 민법 제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내년 12월 말까지 국회가 개정에 나서지 않으면, 해당 규정은 효력 자체를 잃는다.
물론 이론상 개정 시한까진 법률 효력이 있기 때문에 법원에서 해당 규정을 근거로 판결을 선고하는 게 가능하다. 다만 실무적으론 이야기가 다르다. 유류분 소송 당사자들이 상대방의 유류분 상실 사유를 적극 주장한다면 법원 입장에선 민법이 개정될 때까지 경과를 지켜보자고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헌재 관계자는 “당사자간 다툼이 치열하면 법률이 개정될 때까지 기다려보자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설명했다. 상속 사건 경험이 풍부한 한 변호사도 “헌재 결정 소식을 들은 의뢰인이 벌써 관련 문의를 하고 있지만 실무적으로 국회 개정안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미 개정 시한을 넘겨 법률 효력을 잃은 낙태죄 처벌 조항·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시법 조항은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낙태죄는 국회가 4년 넘도록 낙태 허용 범위 등을 규정하는 조항을 만들지 않으면서 합법도 불법도 아닌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처벌 조항은 아직 존재하지만 그 효력을 잃은 결과다.
실제 대검찰청은 2019년 ‘임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기소유예 또는 시한부 기소중지 처리를 하고 있다. 법원도 일단 헌재 결정 취지에 따라 무죄를 선고하고 있지만 새로운 기준은 없는 상황이다.
형사 사건 전문인 한 변호사도 “수사기관 입장에서도 난처할 수밖에 없다”며 “형법상 낙태죄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발 자체는 가능하지만 수사, 처벌하는 게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다른 변호사 역시 “고발장 등을 제출하더라도, 경찰이 ‘어차피 처벌 안 된다’며 반려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시법 조항도 상황은 비슷하다. 헌재는 2009년 “이 조항이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 불합치 결정했는데, 개정 시한이 이미 15년이나 지났다. 이밖에도 ‘32주 전 태아 성별 고지금지’, ‘대통령 관저 100m 집회 금지’ 조항도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지만 개정은 아직이다.
한 변호사는 “입법 공백이라고 순화해서 부르지만 사실상 무법의 영역에 있는 것”이라며 “법적 정비가 안 된 상태에서 혼란을 겪는 의뢰인들이 많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