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스테이지원 제공] |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예요. 행정직이 아닌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라고 소개하는게 참 오랜만이에요. 순수한 음악가로 무대에 서는 것이 마음이 편하네요. 요즘엔 점점 더 음악에 욕심이 생겨요. (웃음)”
고희(古稀)를 앞둔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69)에겐 수사가 많다. K-클래식의 원류인 2세대(1950~60년대 출생)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연주자 출신의 1호 교수, 실내악 앙상블 조이 오브 스트링의 예술감독이자 ‘영재 교육의 산실’의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원장 출신의 교육자….
그 많은 타이틀과 수사를 안고 있으면서도 이성주는 “나의 정체성은 언제나 음악가”라며 “악기가 최고의 친구였고, 악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봤다”고 말했다.
어느덧 데뷔 60주년을 맞았다. 강산이 수없이 바뀔 긴 시간 동안 바이올린을 단 한 번도 놓은 적이 없었다. 최근 서울 한남동에서 만난 이성주는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까지 매 10년 단위로 계획이 있었는데 올해가 60년이나 됐는지는 몰랐다”며 웃었다.
1967년 초등학교 6학년 당시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에 초청, 협연자로 무대에 선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이성주 제공] |
◆ 아홉 살에 데뷔한 서울시향…음악인생 1막의 시작
1964년 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소년소녀 협주곡의 밤’이 열리던 날이었다. 분홍빛의 실크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오른 아홉 살 소녀 이성주. 악단의 2대 상임 지휘자였던 김만복 음악감독의 지휘에 맞춰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4번을 연주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뛰어노는 걸 좋아했던 소녀는 걸핏하면 하얀 스타킹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기 일쑤인 말괄량이였다. 다섯 남매는 저마다 악기를 배웠지만, 반짝이는 재능은 막내에게서 발견됐다. 이성주가 바이올린을 처음 잡은 것은 다섯 살 때였다.
“큰 무대는 처음이었는데, 겁도 없고 두려움도 없었어요. 가족들이 어디에 앉아있는지 다 보이더라고요. 어린 마음에 예쁜 옷을 입으니 마냥 좋기도 했고요. (웃음) 그때부터 나의 음악 인생이 시작된 거였죠.”
아홉 살의 데뷔 무대는 연주자 이성주 삶의 1막 1장이었다. 음악가로의 첫 페이지를 쓴 이후 소녀의 재능은 봄날의 새순처럼 터져 나왔다. 이듬해 이화 경향 콩쿠르에서 특상을 받았고, 1967년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정식 협연자로 초청받아 한 무대에 섰다. 초등학생 협연자는 당시는 물론 지금도 이례적인 일이다. 이후 이화여중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이성주의 삶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1세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세계적인 거장 이츠하크 펄먼을 배출한 이반 갈라미언이 점 찍은 영재가 이성주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쯤이었어요. 줄리어드 음대의 이반 갈라미언 선생님께 연주 테이프를 보냈어요. 그게 오디션이었던 셈이죠. 선생님께서 받아주겠다고, 오라고 하시더라고요.”
1967년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 연주회에 초청된 이성주(가운데)와 스승 김용윤 교수(왼쪽), 지휘자 김만복(오른쪽) [이성주 제공] |
유학을 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1960년대에 그는 언어도 모른 채 혈혈단신 한국을 떠났다. 그 때가 1969년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3개월은 인디애나 포트웨인에서 머물며 언어 공부에 매진했다. 또래의 동양인은 찾아볼 수도 없었지만, “모든 것이 새롭고 호기심이 컸던 때”라고 한다. 언어 공부를 마치고 갈라미언 교수의 여름 캠프로 향했을 때, 지금의 한국 클래식계를 함께 키워온 바이올리니스트 김남윤(1949~2023), 강동석(70)을 만나게 됐다. 거장이 된 세 사람의 소년 소녀 시절 인연의 시작이었다.
“한국인을 만나니 너무 반가워 한국말을 하려는데 석 달간 영어만 쓰니 잘 안 나오더라고요. (웃음)”
이성주의 미국 시절 첫 스승인 갈라미언은 그에겐 ‘미국 부모’와 다름 없었다. 그는 “굉장히 엄격했지만, 자녀가 없다 보니 자식처럼 돌봐준 스승”이라며 “갈라미언 선생님의 오랜 가르침이 나의 백그라운드가 됐다”고 말했다.
갈라미언은 엄격한 스승이었다. 하루에 4~6시간씩 연습을 해야하고, 기본기를 중시했다. 그는 “어린 마음엔 바이올린 연습을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다”며 “그런데 막상 악기를 잡고 나만의 것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연습에 매진하다 보면 몇 시간은 금세 지났다”고 돌아봤다.
“친구들이 ‘너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며 물어보기도 하고, ‘네가 한 연주는 색다르고 좋다’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나만의 표현을 만들어 간다는 성취감이 매순간의 동력이 됐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스테이지원 제공] |
■ NYT가 극찬한 한국인 솔리스트…“나를 키운 것은 음악”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등장했다.” (뉴욕타임스)
1977년 뉴욕 카프만 홀에서 가진 미국 데뷔 무대. 직전 해인 1976년 ‘영 콘서트 아티스트 오디션’에 선발되며 주어진 특전이 바로 이 무대였다. 이미 뉴욕 코지어스코 재단이 주최하는 비에니야프스키 콩쿠르 우승(1974년) 타이틀을 안았지만, 정식 무대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스물두 살, 동양인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등장에 미국도 들썩였다. 그의 음악 인생 2막의 시작이었다.
당시를 떠올리던 그는 “정식 음악가로서 뉴욕에서 데뷔하는 경우도 드물고, 영아티스트로서 리뷰를 받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고 했다.
“그 때의 기분은 말할 수 없어요. 선배랑 뉴욕 72번가 브로드웨이 신문 가판대에 가서 기사를 봤어요. 차마 읽지를 못하겠더라고요. 공연에서도 안 떨었는데 신문을 사들고 달달달달 떨어 선배가 읽어줬어요. 선배가 타이틀을 보고는 ‘됐다!’ 하더라고요.”
이성주의 ‘뉴욕 데뷔’는 그에게는 물론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도 ‘사건’이었다. 이미 연주자로 첫발을 디뎠지만, 이성주의 도전은 계속 됐다. 1978년 차이콥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에 나가게 된 것이다. 냉전 시대에 열린 사회주의 국가의 콩쿠르에 한국인이 참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콩쿠르 두 달 전인 4월엔 소련 영공을 침범한 대한항공의 격추 사건도 있었다. 이민자로 미국 시민권을 발급 받아 부랴부랴 나간 콩쿠르는 ‘별천지’였다.
“콩쿠르에서 이름을 알리는 것이 커리어를 쌓는 데에 도움이 되기에 일종의 도전정신으로 나가게 됐어요. 그런데 당시엔 지금 이 시대는 한국인으로 국제 대회에서 수상한다는 것엔 한계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
심사위원으로 북한 음악가가 자리했고,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1~4등 수상자 중 세 명은 사회주의 국가 출신이었다. 다른 한 명은 미국인이었다. 북한 참가자는 4등을 했다. 당시 이성주는 파이널에 진출해 특별상을 받았다. 심사위원인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긴골드(1909~1995)의 강력한 추천이었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냉전 시대가 아니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마지막 결과를 발표하는 날 북측 사람들이 친한 척 다가와 말을 걸더라고요.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때는 북한 사람들이 말 걸면 한국말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더라고요. (웃음) 혹시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어요.”
이성주는 이후 솔리스트로 세계 유수 페스티벌의 러브콜을 받았고, 독주회와 실내악 연주회로 음악가로의 기량을 닦아갔다. 어딜 가나 동양인 연주자를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였다. 그는 “미국인들이 날 보면 하는 말이 두 가지였다”며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 하냐, 동양인이 왜 이렇게 클래식을 잘 하냐는 말이었다”고 했다. “당시엔 한국이라는 나라를 모르던 때니, 오랫동안 달고 다녔던 별명이 ‘차이나 돌’(중국 인형)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그는 음악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주로 활동한 해외 무대에선 일찌감치 “드라마틱하고 지칠 줄 모르는 대가의 감각”(LA타임스), “상상력 넘치는 연주와 명료한 음악” (슈타트-안자이거)이라고 평가가 나왔다.
물론 긴 음악 활동에서 슬럼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연주자로 커리어를 쌓아가는 매일이 좌절이었다”며 “그 과정에서 나를 키운 건 음악이었다. 무대에서 나의 음악을 연주하고 관중과 소통하는 것이 매일의 보람이었다”고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와 그의 유년시절 스승인 김민 [이성주 제공] |
■ 정상에서 한국으로…“황무지 같던 韓 클래식 음악계로”
세계 무대에서 한창 커리어를 쌓아갈 무렵, 이성주는 한국행을 결정했다. 원조 ‘K-클래식 스타’인 이성주에게 ‘음악 영재들을 발굴하고 키워달라’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러브콜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왜 후회하지 않았겠어요. 한창 활동 중이던 때였으니까요. 당시 이강숙 한예종 총장님의 적극적인 제의가 있었고, 그 무렵 한국 음악계는 황무지였기에 재능있는 학생들이 제대로 된 코스를 밟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연주자 출신 1호 교수’가 되며 교육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이 긴 시기를 음악인생 3막이라고 했다. 1994년부터 한예종의 교수로 지낸 2021년까지, 이후 영재원장(2021~2024년 2월)을 지내고 한예종 명예교수(2021년~)로 지내는 현재까지다.
무대에서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던 이성주는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기초 체력을 키우는 일에 뛰어들었다. 18년차 현악사중주단 노부스 콰르텟의 김영욱은 이성주에 대해 “엄마 같은 스승”이라고 했다.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지금도 국내 주요 악단에 자리하고 있고, 국내외의 주요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도 음악 활동 역시 놓지 않았다. 교육자와 연주자의 일을 병행하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한국에선 교수와 연주자로의 직업은 분리했기에, ‘교수 연주자’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하지만 그는 “미국이나 유럽에선 뛰어난 연주자가 교육자”라며 “연주자와 교육자는 분리될 수 없다. 연주에 대한 지속적인 공부와 갈구가 있어야 학생들도 가르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클래식 음악의 저변 확대를 위해 ‘해설 콘서트’를 열었고, 관객 개발도 이어갔다. 이성주는 “알고 들으면 더 재밌는 것이 클래식 음악이기에 관중들의 지식을 키울 수 있는 공연을 했다”고 돌아봤다. “근데 그 때만 해도 제가 한국어가 서툴러 쉽지 않더라고요. (웃음)”
60주년을 맞은 그는 “음악가는 은퇴가 없다”며 “지금의 내겐 하루하루가 중요하다. 원로 음악가로서 연주자로의 즐거움을 이어갈 생각이다”라고 했다. 60년 동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내내 그는 언제나 공부하는 음악가였다. 최근 열린 ‘이성주와 프렌즈’에선 드보르자크 현악 6중주 가장조 작품48을 처음으로 연주, 새로운 레퍼토리에 도전했다.
“40대를 지나던 언젠가 ‘이제야 음악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50세를 넘으니 그 때 알았던 음악은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음악이 위대한 거죠. 이제야 음악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음악엔 완성이 없어요. 매일 새로운 것을 발견하며, 지금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느껴요. 죽는 날까지 공부해야죠. (웃음)”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