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현지시간) 이란 테헤란 시내 발리-에-아스르 광장에서 한 성직자가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애도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AP] |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헬기 추락 사고로 숨진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50년 넘게 운행된 미국산 노후 기종에 탑승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대통령의 헬리콥터가 이처럼 노후된 것은 수십 년간 이어진 국제 제재 영향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미국과 단교한 이란이 미국의 각종 제재로 인해 헬리콥터 유지 및 보수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라이시 대통령이 탄 사고 헬리콥터는 미국 기업 ‘벨 헬리콥터’가 개발한 ‘벨-212’로 1968년에 초도 비행을 실시해 1998년에 단종된 기종이다. 전문가들은 이 헬기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전부터 운행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글로벌 항공 분석 업체 시리움에 따르면 이란에 등록된 벨-212 15대의 평균 연식은 35년으로, 만약 추락한 기종이 생산 초기 모델일 경우 50여 년 된 헬기일 수 있는 셈이다.
이란 국영 IRNA 통신도 이날 라이시 대통령을 기리는 영문 기사에서 “라이시 대통령은 19일 호다 아파린 댐에서 타브리즈 정유공장으로 돌아오던 중 ‘기술적 고장(technical failure)’으로 발생한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순교했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오랜 기간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아왔다. 지난 1995년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 시절 미국은 이란에 대해 상업용 항공기 금수 조치를 취했다. 이후 2015년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를 통해 이란에 대한 일부 제재가 해제되는 듯 했지만,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를 탈퇴하면서 대(對)이란 단독 제재를 잇달아 내놓았다.
당시 세계 최대 민간항공기 제조업체인 보잉은 미국의 이란핵합의 파기에 따라 이란에 항공기 인도를 중단, 2016년 이란과 맺은 166억달러(약 22조5000억원) 규모의 항공기 80대 판매 계약을 무효화했다.
이로 인해 이란은 항공기 부품의 국내 생산과 공급을 늘리려고 노력에도 한계에 부딪쳤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그 결과로 러시아산 불량 비행기를 사용하거나, 때로는 암시장에서 구입한 예비 부품을 구매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NYT는 지적했다.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연구그룹 채텀하우스의 중동 전문가 사남 바킬은 이란의 항공 분야가 제재로 인해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어왔다며 “이번 헬기 사고 뿐만 아니라 비행기 추락 등 많은 항공사 사건이 있었고, 이는 분명 제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분석했다.
이와 관련 미국은 이번 추락사고가 자국을 향한 비난으로 변질되는 것을 강력하게 차단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악천후에 (헬기가) 추락한 것 외에 다른 정보가 없었음에도 이란이 이스라엘과 미국이 수송을 방해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고 미 행정부 고위 관리 3명을 인용해 전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전 이란 외무장관. [AP] |
실제로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전 이란 외무장관은 이날 이란의 항공 산업에 제재를 가함으로써 미국이 이번 충돌에 책임이 있다며 “미국의 범죄는 이란 국민과 역사 속에 기록될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이란 관영 통신사 IRNA이 보도했다.
이에 대해 매튜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성명을 내고 “악천후의 상황에서 45년 된 헬기를 띄우기로 결정한 책임은 이란 정부에 있다. 다른 그 어떤 행위자도 아니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