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5만원권을 정리하고 있다.[연합] |
[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기준금리보다 낮은 예금금리’라는 지적과 함께 두 달간 감소세를 기록했던 은행 정기예금 상품 잔액이 이달 들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꾸준히 시중 통화량이 늘어나는 가운데, 여타 투자처인 주식 및 코인시장이 침체기를 맞으며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두드러진 결과다. 이 상황에 은행은 남몰래 웃음짓고 있다. 이전에 비해 비교적 저비용으로 시중의 자금을 흡수하며, 이에 따른 수익성 향상이 기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31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달 27일 기준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정기예금 잔액은 885조228억원으로 전월말(872조8820억원)과 비교해 12조1408억원(1.39%)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3월과 4월 5대 은행 정기예금 잔액은 각각 12조8740억원, 4941억원가량 줄어든 바 있다. 이달 들어 은행 정기예금을 찾는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셈이다.
은행권에서는 각종 투자처를 떠돌던 자금이 대표적 ‘안전자산’인 정기예금으로 선회한 결과라는 해석이 많다. 실제 대표 투자처인 증시 거래대금은 이달 들어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달 일평균 증시 거래대금은 20조원을 하회하고 있다. 전월(22조4169억원)과 비교하면 2조원 이상 줄어든 수치로, 올 들어 가장 낮은 수준이다.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직원이 전광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연합] |
올해 투자자들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던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시장 또한 이달 들어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코인셰어즈에 따르면 지난주 코인 시장의 주간 거래량은 105억달러로 400억달러 수준까지 치솟았던 지난 3월과 비교해 크게 줄어들었다. 여타 투자처에서 큰 수익을 보지 못한 자금들이 안정적 수익원인 ‘정기예금’으로 몰렸다는 얘기다.
실제 한 투자처에 떠돌지 못하고 은행에 몰렸던 ‘대기자금’도 최고점에 비해 규모가 줄었다. 5대 은행의 요구불예금 잔액은 지난 3월 말 공모주 청약 등의 영향으로 647조8800억원까지 치솟은 바 있다. 그러나 현재는 27일 기준 628조7100억원 규모로, 20조원가량 줄었든 상태다. 시중을 떠돌던 자금 중 일부가 정기예금에 정착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오는 하반기 중 금리 인하 가능성이 제기되며, 정기예금 금리가 ‘고점’을 찍었다는 전망도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박태형 우리은행 TCE금융센터 PB팀장은 “미국 기준금리가 언제 인하될지는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9월로 보는 시각이 많다”며 “실제 기준금리 인하가 시작될 경우 정기예금 금리가 더 내려갈 수 있다는 우려에 미리 투자하는 사례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한 시중은행 영업점에서 고객이 업무를 보고 있다.[연합] |
특이한 점은 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기준금리와 유사한 수준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기준 5대 은행의 주요 정기예금 상품의 최고금리(1년 만기)는 3.5~3.55%로 집계됐다. 지난해 12월 말에 3.9~3.95% 수준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올 들어 0.4%포인트가량 줄어들었다는 얘기다. 심지어 기준금리(3.5%)를 하회하는 수준의 금리를 제공하는 예금 상품도 허다하다.
은행권에서는 은행채 등 시장금리가 하락하며, 수신금리가 따라 내렸다는 설명을 내놓고 있다. 실제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7일 기준 은행채(1년물, AAA) 금리는 3.62%로 지난 1월초(3.71%)와 비교해 0.1%포인트 줄었다. 하지만 예금금리 하락폭과 비교했을 때는 적은 수준이다.
서울 한 거리에 주요 시중은행의 ATM기기가 설치돼 있다.[연합] |
실제로는 은행들이 정기예금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필요성이 줄어들며, 금리 수준을 낮춘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올 1월 말 기준 591조원 수준에 불과했던 요구불예금 잔액은 지난 27일 기준 629조원으로 약 38조원가량 늘었다. 이는 은행이 자금을 거의 ‘공짜’로 조달했다는 의미다. 요구불예금에는 수시입출금식 통장 등이 포함되며 이자율이 평균 0%에 가깝다.
그런데도 시중에 풀리는 자금이 늘어나고, 여타 투자처의 매력도가 떨어지며 은행으로의 ‘자금 쏠림’ 현상은 심화하고 있다. 여기다 ‘공짜예금’인 요구불예금 또한 전반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 중이다. 은행들이 시중 자금에 '헐값'을 메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앞다퉈 자금을 예치하며, 은행만 배 불리고 있는 셈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올 초에 고원가성 예금 다수가 만기되며, 조달비용 재편성이 이뤄진 데다, 요구불예금 잔액도 늘어났다”면서 “조달 비용 개선이 기대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