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카바넬, '타락천사', 1847, 캔버스에 유채, 121x190cm, 파브르 미술관 |
그런데… 왜 '그분'만 항상 저 위에 있어야 하는가.
천사 루시퍼는 문득 의문을 가졌다. 길고 긴 세월을 살면서도 처음 해본 생각이었다. 루시퍼는 하늘에서 가장 힘세고, 제일 영리하고, 최고로 아름다운 존재였다. 오직 그분, 하느님을 제외하면 분명 그랬다. 그렇기에 서서히 교만에 물든 것이었다. "오랜 생각이었다." 루시퍼는 기어코 추종자를 불러 모아 그의 속마음을 내보였다. “나도 그분처럼 하늘로 오르려고 한다. 하느님의 별들 위에 내 왕좌를 새롭게 세울 생각이다.” 그러고는 침을 꼴깍 삼키는 이들에 대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하여, 나는 저 구름 꼭대기까지 올라가 가장 높으신 그분처럼 되리라." “…이를 어떻게 이루실 겁니까?” 그런 루시퍼에게 대고 한 추종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께서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면, 내가 가져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누구도 감히 상상한 적 없는 반란 선언이었다.
프란츠 폰 슈투크, '루시퍼'.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루시퍼의 모습으로 그린 '타락천사'와는 분위기와 외모에서 큰 차이가 있다. |
"모두에게 고한다. 특히, 그분도 함께 들으시길 바란다."
그날부터 반역을 준비한 루시퍼는 그가 정한 결전의 순간, 하늘에 대고 외쳤다. 루시퍼의 목소리는 전역에 울려퍼졌다. "내게 이토록 강한 힘이 있으니, 당연히 하늘도 잠잠하게 있고 별들도 내 발밑에 깔려야하지 않겠는가." 루시퍼는 이 말과 함께 새하얀 날개를 선전포고하듯 활짝 폈다. 루시퍼를 추종하는 무리가 장막 같은 이 날개 뒤로 벌 떼처럼 몰려왔다.
잔혹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하느님의 군대, 그리고 반역자 루시퍼가 통솔하는 군대가 정면으로 맞붙었다. 전쟁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루시퍼는 뜻을 이루기 위해 이간과 반목, 기습과 암살 등 할 수 있는 모든 추악한 짓을 시도했다. 하지만 전능한 그분을 끝내 이길 수는 없었다. 루시퍼는 결국 치명상을 입고 무릎을 꿇었다. 분함을 못 이긴 채 바닥을 퍽퍽 쳤다. "너는 지옥에 가리라." 이때, 이번에는 하느님의 뜻이 내리깔렸다. “네 부하들도 당연히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곳에서 불타고, 억압받고, 고통받게 될 것이다.” 스러진 루시퍼는 그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는 분노와 슬픔, 모멸과 치욕 등 평생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을 떨치지 못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타락천사', 1847, 캔버스에 유채, 121x190cm, 파브르 미술관 |
프랑스 화가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그런 루시퍼의 모습을 상상해 그렸다.
제목은 〈타락 천사〉다. 매서운 눈과 조각같은 몸을 가진 미소년 루시퍼가 팔을 꼰 채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런 루시퍼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그는 울고 있다. 울분과 분노로 가득한 두 눈에서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그것은 자존심 센 그가 끝까지 감추고 싶었던 모습이었다. 루시퍼의 탐스러운 날개는 먹물에 빠진 듯 검게 물들고 있다. 이미 타락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군대는 그런 루시퍼 뒤에서 승리의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카바넬은 당돌한 천사 루시퍼를 더는 아름답게 그릴 수 없을 만큼 눈부신 외모로 묘사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그는 결과적으로 이 그림 탓에 엄청난 비난에 휩싸여야 했다.
"…크나큰 야망을 품고 반역하면 하느님과 감히 같아지리라 믿었기에 (…) 헛되이 오만한 전투를 벌였다. (…) 전능하신 하느님은 천상의 하늘에서 무서운 추락과 파멸로 응징하고 그를 불 붙여 바닥없는 지옥에 거꾸로 내던지셨나니…" (존 밀턴, 실낙원 중 일부 발췌)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지옥 편)〉 속 루시퍼(삽화). |
카바넬은 영국의 대시인 존 밀턴이 쓴 《실낙원》을 읽고 〈타락 천사〉를 그렸다.
그런데, 《실낙원》 등에서 묘사되는 루시퍼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퇴장하지 않는다. 루시퍼의 이야기는 외려 이때부터 새로운 시작점을 맞는다. 지옥에 떨어진 루시퍼는 곧장 악마의 궁전을 세운다. 루시퍼는 그곳에서 하느님에게 보복할 생각만 품고서 다시 힘을 키운다. 루시퍼의 군대는 끝내 지옥을 둘러싼 울타리를 부수고, 다시 하느님의 군대와 대치한다. 이번에는 절치부심한 루시퍼가 거의 이길 뻔도 했다. 승기를 잡으려는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집혔고, 지옥에서 돌아온 이들은 또다시 심연의 구렁에 빠져야 했다.
루시퍼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제 그는 또 다른 복수 계획을 짠다. 그것은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 아담과 이브를 자신처럼 타락시키는 일이었다. “그분께서 이걸 못 하게 했다고? 고작 과일 하나 따 먹는 게 무엇이 그렇게 대수란 말이냐!" 뱀으로 변한 루시퍼는 이브를 밤낮으로 꼬드긴다. 결국 이브는 창조주가 금한 선악과를 딴다. 아담도 뒤따라 그 계율을 어긴다. 이들 또한 루시퍼처럼 하느님에 맞서 반기를 들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간의 낙원 추방이었다. 그러니까, 루시퍼는 단순한 반역군 대장으로 두기에는 힘든 감이 있었다. 그는 하느님에 맞선 최악의 적이었고, 인류의 입장에선 철천지원수였다.
그런 루시퍼를 왜 이렇게 숭고하게 그렸는가.
굳이 이렇게까지 비운의 영웅처럼 숭고하게 그린 이유는 무엇인가. 기성 화단은 카바넬의 〈타락천사〉를 놓고 표한 의문은 이것이었다. 실제로 그간 많은 화가가 루시퍼를 있는 힘껏 볼품없이 묘사했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 '루시퍼와 반역한 천사들을 추방하는 성 미카엘', 1622, 캔버스에 유채, 149x126cm,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대표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루시퍼와 반역한 천사들을 추방하는 성 미카엘〉이 대표적이다. 루벤스는 하느님의 군대에서 지휘관을 맡은 미카엘이 루시퍼 일당을 제압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미카엘과 그의 동료는 우아하고 성스럽게 그린 반면, 루시퍼와 그의 추종자는 뿔과 송곳니가 달린 괴물로 화폭에 담았다. 기성 화단 입장에선 카바넬이 루시퍼를 단독 주인공으로 둔 일 자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루벤스도 그렇게 그렸듯, 지금껏 화가들은 루시퍼를 하느님 내지 미카엘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조연처럼 다룰 뿐이었다. 압도적인 빛의 힘에 밀려 눌리고, 깔리고, 얻어맞고 있는 식이었다. 하지만 카바넬은 정반대로 루시퍼 뒤에서 날고 있는 '진짜 천사'들을 외려 흐리멍덩하게 표현했다.
"정밀하지 못한 데생, 부자연스러운 움직임…. 이것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그림이다."
“얼굴 등 꾸밈의 수준이 도를 넘어 보기에 불편하다."
카바넬의 〈타락천사〉를 본 그 시절 다수 평론가의 평가였다. 종교와 예술 두 분야를 모두 욕보이는 이따위 그림을 내놓지 말라는 얘기였다.
카바넬도 〈타락천사〉가 이런 파문을 일으킬 것은 알고 있었다.
"천국에서 섬길 것인가. 지옥에서 다스릴 것인가." 그럼에도 카바넬이 붓질을 한 건 《실낙원》 속 루시퍼의 이런 고민, 그리고 끝내 자유의 깃발을 들어올린 행보에 큰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카바넬 또한 ‘신은 멋지게, 악마는 흉측하게’라는 정형화된 기조에 맞서 자유를 택한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다는 말이 있다. 아울러 이토록 완벽한 존재 또한 교만에 물들면 추악한 최후를 맞는다는 교훈도 함께 담았다는 분석도 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 캔버스에 유채, 130x225cm, 오르세 미술관 |
그런 카바넬은 얼마 후 또다시 기성 화단을 들썩이게 한다.
이번에 주목을 받은 그림은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되는 〈비너스의 탄생〉이었다. 비너스의 탄생 설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그 특이한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별난 편에 속한다. 설화에 따르면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태초의 신 카오스가 등장한다. 이어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눈을 뜨고, 가이아는 스스로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낳는다. 엄밀히 보면 어머니와 자식 관계지만,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윗세계와 아랫세상의 융합을 위해 주저없이 결혼한다. 이후 둘 사이에서 티탄(거신족) 열두 남매와 손재주 좋은 키클롭스 삼형제, 머리 50개와 손 100개를 갖는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가 탄생한다.
우라노스의 불안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는 특히나 키클롭스와 헤카톤케이레스의 힘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들을 지하 지옥인 타르타로스에 가둬버렸다. 사실상 가이아(대지)의 자궁에 도로 밀어넣은 셈이었다. “아버지 우라노스가 다시 어머니와 다시 동침하려는 그 때, 제가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기겠습니다.” 격분한 어머니 가이아를 위해 아들 크로노스가 나선다. 낫을 든 크로노스는 결전의 날, 아버지 우라노스 몰래 다가가 그의 성기를 잘라버린다. 떨어진 그 부위는 바다에 떨어졌다. 그런데, 거기서 거품이 마구 뿜어져나온다. 그 속에서 미(美)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처음으로 세상 빛을 본다.
카바넬은 이처럼 여러 사연을 안고 출생하는 비너스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었다.
우선 굉장히 잘 그려진 그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그 시대 사람들은 카바넬의 이 그림을 보고 묘한 기분에 젖었다. 일렁이는 파도를 침대 삼아 누워있는 비너스는 언뜻 봐도 음란한 요녀처럼 보였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 풍만한 몸, 유혹하는 듯한 도발적인 자세는 야릇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혼자서만 봐야 할 듯한, 보다가도 괜히 주변을 살펴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산드로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1485, 캔버스에 템페라, 172.5×278.6cm, 우피치 미술관 |
카바넬의 그림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과도 확실히 달랐다. 보티첼리의 그림 속 비너스는 어쨌든 자신의 나체를 숨기려고 한다. 오른편에 선 계절의 여신 호라이도 천으로 살굿빛 몸을 가려주고자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다. 원래는 이런 그림이 정석이었다. 카바넬은 또다시 교본을 따르지 않고 파격을 택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 |
하지만 카바넬은 〈타락 천사〉를 그렸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기성 화단의 압도적 찬사를 받았다.
〈타락 천사〉가 나쁜 쪽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면, 〈비너스의 탄생〉은 좋은 면으로 화제 반열에 올랐던 셈이다.
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악당이나 현실 속 여성이 아닌, 미의 여신을 그렸다는 게 핵심이었다.
즉 기성 화단이 좋아한 신화화(神話畵), 그중에서도 선호 소재인 비너스를 누구보다 찬란하게 그렸다는 것 만으로 이번에는 합격이었다. 카바넬이 그림 속 이토록 아름다운 주인공을 두고 악당이나 악마같은 존재, 혹은 현실 여성의 실명을 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미의 여신을 야하게 그리면 괜찮고 현실 여성을 음란하게 그리면 불경스럽다는 당시의 인식 자체가 모순적이지만, 그때는 그런 세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다 젊었을 적 카바넬이 품은 꼿꼿한 정신도 한층 부드러워진 감이 있다. 그는 그동안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익힌 셈이었다. 카바넬은 〈비너스의 탄생〉으로 프랑스 파리 살롱전(展) 금상을 받았다. 황제 나폴레옹 3세도 이 그림을 탐내 현장에서 사들이는 등 당시 최고의 영광도 누렸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죄수에게 독극물을 시험하는 클레오파트라' |
카바넬은 그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 기술적인 면에서는 천재적인 실력을 갖춘 화가였다.
카바넬은 1823년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출생했다. 카바넬은 어릴 적부터 목수 아버지 밑에서 손재주를 익혔다. 그런 그는 1840년 열일곱 나이로 파리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재능을 꽃피우기에 알맞은 곳을 찾은 카바넬은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하기 시작했다. 스물한 살부터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한 그는 1년 뒤에는 당대 젊은 화가들의 꿈인 로마상(Prix de Rome)까지 손쉽게 거머쥐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오레스테스', 1846, 캔버스에 유채, 베지에 미술관 |
카바넬은 로마상의 특전 격으로 몇 년간 이탈리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여러 시도에 나서봤다.
가령 카바넬은 1846년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참고해 〈오레스테스〉를 그렸다. 이 또한 동시대 화가들이 같은 소재로 그린 그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오레스테스는 복수자(復讐者)였다. 친아버지를 살해한 친어머니와 그녀의 정부(情夫)에게 똑같이 죽음을 안겨 앙갚음한 인물이었다. 이는 예언의 신 아폴론의 신탁을 받고 행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패륜의 짓이었다. 그래서 세 자매인 복수의 여신 무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카바넬은 이런 처지에 놓인 오레스테스의 모습을 감성적으로 그렸다. 그의 전매특허인 아름다운 신체 묘사를 앞세워 은은한 분위기를 더했다.
카를 랄,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 1852년경, 캔버스에 유채, 154x202cm, 아우구스투스움 |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 1862, 캔버스에 유채, 227x278cm, 크라이슬러 뮤지엄 오브 아트 |
이는 같은 시대를 산 화가 카를 랄과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가 각각 그린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오레스테스 그림에 대해선 이들처럼 시끌벅적하게 표현하는 게 당시 교과서에 가까웠다. 그래서였을까. 그간 승승장구한 카바넬은 〈오레스테스〉로 생애 첫 좌절을 겪었다. 살롱전 심사위원들은 이 그림에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카바넬은 그러고도 나름의 새로운 도전을 이어갔다.
그는 〈오레스테스〉를 그린 그다음 해에 〈타락천사〉를 공개한 것이었다. 그리고, 카바넬은 보수적인 기성 화단의 공격으로 또다시 만신창이가 된 것이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황혼의 천사', 1848, 캔버스에 유채, 19x23cm, 파브르 미술관 |
카바넬은 〈타락천사〉를 내놓고 얼마 안 돼 〈황혼의 천사〉를 선보였다.
초승달이 뜬 밤, 손에 턱을 괴고 앉아있는 천사는 상념에 깊이 잠긴 것처럼 보인다. 천사는 그렇게 달이 지고, 또다시 해가 지는 게 수차례 반복되는 동안에도 망부석처럼 있을 듯해보인다. 당시 카바넬의 모습을 이런 천사의 상황에도 포개볼 수 있다. …현실에 녹아들 것인가, 〈오레스테스〉와 〈타락천사〉처럼 앞으로도 계속해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할 것인가. 이러한 고민을 하는 카바넬의 모습도 포개진다. 카바넬은 〈비너스의 탄생〉에서 보였듯, 결국은 그가 기성화단의 비판 앞에서 한 발짝 물러서길 택한 듯하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오필리아', 1883, 캔버스에 유채, 77×117.5cm, 개인소장 |
카바넬은 다시 꽃길을 걸었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선택한 화가가 된 카바넬은 1864년에 에콜 데 보자르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 학생을 가르쳤다. 1868년부터는 열일곱 번이나 살롱전의 정식 심사위원으로 출품작에 점수를 매겼다. 카바넬의 말년 대표작은 〈오필리아〉다. 오필리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등장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사랑둥이였던 오필리아는 연인 햄릿과의 결별, 그런 햄릿의 손에 죽고만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 앞에서 실성한다. 꽃을 꺾으며 숲을 떠돌게 된 그녀는 시냇물에 빠져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카바넬의 독보적인 기교를 이 그림에서 선보였다. 초점 잃은 오필리아의 눈, 그녀 목 아래로 떨어지는 빛, 섬세한 옷 주름과 나무와 꽃에 묻은 부드러운 색채 등 무엇 하나 허투루 그려진 게 없다. 압도적인 디테일이었다. 다만, 〈오레스테스〉 때의 독창성, 〈타락천사〉를 그릴 당시의 파격성은 옅어졌다. 화가 대부분이 소재로 삼는 이 장면을 그 시절 기준에 맞춰 가장 아름답게 표현했을 뿐이었다. 수백명의 제자를 양성한 카바넬은 1889년 1월에 사망했다. 사람들은 그의 사망 직후 얼마 안 돼 대리석 흉상을 세울 만큼 깊이 슬퍼했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Harmonie' |
요즘 시대의 일부 사람들은 카바넬을 두고 끝내 현실에 굴복하고 만 화가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카바넬이 〈비너스의 탄생〉을 출품한 그해, 그보다 아홉 살 어린 에두아르 마네는 같은 살롱전에 희대의 논란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선보였다. 카바넬이 수상의 영광을 누리는 동안 마네의 이 그림은 낙선작이 돼 손가락질받는 상황을 겪었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
같은 누드화였지만 카바넬은 신, 마네는 보통의 인간을 그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외려 마네가 ‘인간의 세계를 그림에 끌어들였다’는 평과 함께 모더니즘의 선구자라는 평을 받는다. 카바넬은 그런 마네의 대척점이 돼 전형적인 관료 화가였다는 인상을 주게 됐다. 하지만, 이렇듯 알고 보면 카바넬도 보다 젊을 적에는 그가 할 만큼의 혁신은 시도를 한 것이었다. 모두가 야수의 심장을 가질 수는 없는 게 세상의 이치 아닌가. 굳이 따지자면 카바넬은 현실과 현재를 택했을 뿐이다. 다만, 그렇게 혈기왕성했던 카바넬은 찍어누르려고 한 기성 화단의 고집스러움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는다.
알렉상드르 카바넬, '판도라' |
〈참고 자료〉
실낙원, 존 밀턴, 문학동네
신곡, 단테 알리기에리, 민음사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 민음사
Alexandre Cabanel, Bluhm, Andreas, Hirmer Verl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