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회장. [AP] |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우리의 경쟁 상대는 인간의 수면 시간이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회장은 지난 2019년 11월 미국 맨해튼에서 열린 뉴욕타임스 딜북 콘퍼런스 연사에서 이 같은 말을 남겼다. 그는 “미치도록 보고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영화를 본다”며 “구독자 수는 중요한 기준이 아니다. 소비자들이 얼마의 시간을 쏟는 지가 스트리밍 전쟁의 승자를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인들에게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는 이제 생활 필수 아이템이다. 넷플릭스 창업자 헤이스팅스가 한 이 말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휴대폰을 놓지 않는 현대인의 삶에서 경쟁해야 할 부분을 정확히 짚어냈다.
헤이스팅스는 온라인 시대가 가지고 올 변화를 정확히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콘텐츠 소비의 흐름마저 바꿔 버렸다. 넷플릭스가 만들어낸 ‘몰아보기’와 고객 추천 시스템 ”이 대표적이다.
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에서 불편을 느끼는지 탐구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넷플릭스라는 기업은 헤이스팅스라는 한 사람의 재치와 통찰력의 결정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비디오테이프. [123rf] |
글로벌 최대 OTT 넷플릭스는 별 것 아닌 ‘불편함’에서 시작됐다. 비디오를 제 때에 반납하지 못해 40달러의 연체료를 내게 된 헤이스팅스는 연체료 없는 대여 서비스라는 사업 아이템을 착안하게 됐다.
마침 첫 직장 동료 마크 랜돌프와 우편을 이용해 영화를 볼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던 헤이스팅스는 소비자들이 ‘방문해 빌려야 하는’ 서비스 통념을 뒤엎고 ‘집으로 발송’이라는 신개념을 내놓았다. 1997년 8월 캘리포니아주 스코츠밸리에서 5달러 월정액의 회원제 서비스가 넷플릭스의 시초다. 1998년 인터넷을 뜻하는 ‘넷’과 영화 주문을 뜻하는 ‘플릭스’를 합쳐 탄생한 넷플릭스닷컴은 비디오테이프 대신 DVD로 갈아탔고, 미국인들은 우편 서비스에 열광했다.
넷플릭스 로고. [로이터] |
회원 기반과 콘텐츠 목록을 확장한 넷플릭스는 2007년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새로 내놓았는데, 이것이 OTT 사업의 태동이었다.
2011년 두 번째 혁신을 꾀했다. 콘텐츠 유통자에 국한되지 않고 콘텐츠 생산자를 자처한 시도다. 당시 업계에선 전무후무한 사례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
이리하여 탄생한 것이 2013년 넷플릭스 최초의 오리지널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다. 해당 드라마가 나온 이후 콘텐츠 업계엔 핵폭탄급 변화를 불러일으키며 넷플릭스라는 브랜드도 각인됐다. 그동안 다음 회차를 마음 졸이며 기다려야 했던 소비자들에게 한번에 ‘몰아보기’라는 신개념이 제대로 먹히면서다.
넷플릭스의 몰아보기 시도는 시청자의 콘텐츠 소비 방식은 물론이고, 미디어 회사의 콘텐츠 배포 방식도 완전히 바꿔 놨다.
너무 앞서간 거 아니냐는 비웃음을 뒤로하고 넷플릭스는 2017년 가입자 1억명을 확보하며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코로나19 사태로 비대면 산업이 대세가 된 2020년 말에는 가입자 2억명을 돌파했다.
넷플릭스 자체 제작 드라마와 영화들은 승승장구 했다. 미국 뿐만 아니라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 해외에서도 그 나라 문화에 맞는 드라마를 자체 제작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2019년에 첫 넷플릭스 드라마로 ‘킹덤’이 나왔고, 이어 2021년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으로 히트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
지난 2021년 10월 넷플릭스가 3분기 실적발표를 할 당시 리드 헤이스팅스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복장을 착용한 모습. [유튜브 캡처] |
사용자가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불편해하는지를 놓고 헤이스팅스의 고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용자들이 영화를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넷플릭스는 ‘시네메치’라는 영화 추천 엔진을 개발한다. 시네매치 엔진은 사용자의 시청기록 평가, 검색 기록 등을 수집하고 분석해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한다.
여기에서도 헤이스팅스의 창의적인 마케팅 전략이 빛을 발한다.
2007년 초 넷플릭스는 뉴욕타임스에 ‘넷플릭스의 시네매치 정확도를 10% 이상 개선하는 팀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게재한다. 상금은 100만달러. 2009년 우승자가 결정될 때까지 186개국 4만 개 팀이 참가하며 이 자체로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상금보다 공모전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도전했다는 유명인 중에는 딥러닝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도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올리는 마케팅으로 기술 문제까지 해결한 영리한 한 수였다.
헤이스팅스는 역대 최대 흥행작인 ‘오징어 게임’ 덕분에 2021년 3분기에 호실적을 기록하자 이 드라마에 나오는 초록색 체육복을 입고 실적 발표 행사를 진행했고 ‘오징어 게임’을 콘텐츠 엔진에 비유했다. 대중의 환호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헤이스팅스다운 발상이다.
올해 기준 헤이스팅스는 순 자산만 46억달러(약 6조2800억원)를 보유하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당시,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회장이 작품 속 유니폼을 입고 자신이 457번째 참가자라고 인증 사진을 올린 모습. [넷플릭스 제공] |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회장이 지난 1983년부터 평화봉사단에 가입해 에스와티니(스와질란드)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모습. [인터넷 캡처] |
헤이스팅스는 1960년 미국 메사추세츠주 보스턴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윌모트 리드 헤이스팅스 주니어(Wilmot Reed Hastings, Jr)’로, 아버지 윌모트 헤이스팅스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윌모트 리드 헤이스팅스는 미 해병대에서 복무했고, 어머니 조안 아모리 루미스는 수학자였다. 헤이스팅스는 교육과 규율을 중시하는 가정에서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 성장했다. 이 같은 호기심은 훗날 그의 기업가 정신과 리더십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그는 미국 메인주 브런즈윅에 위치한 보든대학 수학과를 1983년 졸업했다. 입학 첫 해에 학교를 휴학하고 1년 동안 집집마다 청소기를 판매하는 방문 세일즈맨으로 일했다. 헤이스팅스는 세일즈맨으로 일했던 순간을 “기상천외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학업에서도 높은 성과를 거뒀다. 당시 보든대학 수학과는 전통적인 강의식 수업 대신 학생이 교수·동료와 일대일로 만나 수업을 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헤이스팅스는 이 프로그램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에게 주는 스미스상을 수상했다. 헤이스팅스를 가르쳤던 빌 바커 교수는 “(헤이스팅스의) 수석 논문은 우리가 본 최고의 우등 프로젝트였다”고 당시 그를 평했다고 한다.
헤이스팅스는 3학년 때 한 학기를 영국 배스 대학에서 보냈는데 그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내가 얼마나 세상에 대해 적게 알고 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됐다”고 회상했다.
헤이스팅스는 아버지의 길을 따라 1981년 여름 6주 기간의 해병대 신병 훈련에 자원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중도 하차했다.
이후 헤이스팅스는 대학을 졸업한 해에 에스와티니(스와질란드)에서 평화봉사단으로 2년 동안(1983~85) 고등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당시 지역 주민들이 살인벌 때문에 피해를 입자 안전한 양봉 사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미국 정부에 제안서를 작성했는데, 정부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헤이스팅스는 에스와티니에서 돌아온 뒤 인공지능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스탠포드대 컴퓨터공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졸업 이후에는 잠시 개발자로 일하기도 했다. 1990년 입사한 어뎁티브 테크놀로지에서 헤이스팅스는 소프트웨어 디버깅 도구를 개발했다.
퓨어 소프트웨어를 창립했을 당시의 리드 헤이스팅스(가운데). [인터넷 캡처] |
헤이스팅스는 1991년 어댑티브 테크놀리지를 나와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위한 도구를 만드는 ‘퓨어 소프트웨어’를 만들며 창업자의 길로 들어섰다.
퓨어 소프트웨어는 몸집을 불리며 성공하는듯 했으나 1997년 결국 경쟁사인 래셔널 소프트웨어에 매각된다. 사내 규정과 통제로 인해 창의력이 남다른 인재들을 떠나게 만든 게 실패 요인이었다.
헤이스팅스는 “기업들은 그들이 속한 산업의 생태계에 변화가 생길 때 대부분 도태된다”며 “퓨어 소프트웨어도 업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혁신에 최적화돼 있지 않았고, 유연성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다만 매각자금은 넷플릭스 설립에 종잣돈이 됐다.
넷플릭스 초창기의 리드 헤이스팅스 회장의 모습. 당시 비디오를 배달하기 위해 사용되던 넷플릭스 로고의 우편봉투가 그의 손에 들려 있다. [인터넷 캡처] |
넷플릭스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설립 초기 사용자에게 받는 개별 요금이 낮은 데다가, 콘텐츠의 순환이 빨리 이뤄지지 않으면서 적자에 빠졌다. 2000년 당시 예상 손실액만 5700만달러에 달할 만큼 심각한 경영난에 처했다.
결국 헤이스팅스는 회사를 팔기로 마음 먹고 대형 비디오 대여체인이었던 블록버스터의 존 안티오코 최고경영자(CEO)를 만났다. 당시 블록버스터는 전 세계에 9000개 가까운 비디오 대여점을 거느린 대형 홈 엔터테인먼트였고 넷플릭스는 설립 2년 밖에 안된 스타트업으로 직원은 100명에 불과했다.
헤이스팅스의 입에서 매각 대금으로 5000만달러라는 거액이 나온 순간, 거래는 수포로 돌아갔다.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그러나 매각 실패는 결과적으로 넷플릭스에겐 행운이었다고 봐야겠다. 비디오 서비스에 머물던 블록버스터는 2010년 파산했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회장. [넷플릭스 제공] |
퓨어 소프트웨어에서의 실패를 경험삼아 헤이스팅스는 넷플릭스에서 ‘인재 밀도’ ‘솔직한 문화’ ‘통제 최소화’ 등 3가지를 기업 문화로 확립했다.
넷플릭스는 근무 시간 제한이 없다. 직원들은 자유자재로 휴가를 쓴다. 업무에 필요한 기기를 구매한 후 청구하면 되고, 상부 허가 없이 새로운 업무나 아이디어를 추진할 수 있다.
하지만 역량에서는 최고 수준을 요구한다. 업계 최고의 직원을 채용하고 손 꼽힐 정도의 대우를 제공하는 반면, ‘보통 수준’으로 역량이 떨어지면 정리해고 한다. ‘회사에서 오래 일했다’, ‘열심히 노력했다’ 등은 넷플릭스와 리드 헤이스팅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회사를 떠나야 한다.
이는 자유와 책임을 중시하는 헤이스팅스의 기업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다. 직원들에게 높은 수준의 복지와 자유로운 의사결정권을 부여한 만큼 이에 걸맞는 성과와 책임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게 헤이스팅스의 경영 철학이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회장. [유튜브 캡처] |
경쟁 OTT 서비스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지만 넷플릭스만 여전히 수익을 내며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
지난달 초 넷플릭스가 발표한 실적 보고서에 따르면 1분기 영업이익은 26억달러(약 3조5880억원)로 지난해 1분기 17억달러(약 2조3460억원) 대비 54% 급증했다. 매출은 93억7000만달러(약 12조9306억원)로 1년 전보다 14.8% 늘어났으며, 순이익은 23억3200만달러(약 3조2182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78.7% 증가했다. 전 세계 가입자 수는 933만 명 증가해 총 2억6960만 명이 됐다.
지난해부터 헤이스팅스는 회장직만 유지한 채 일선에서 물러났다. 당시 넷플릭스가 2022년 4분기 큰 폭의 성장세를 기록했음에도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헤이스팅스는 퇴진 이유에 대해 “창업자도 진화해야 한다”며 앞으로 회장 역할과 자선 사업 등에 전념한다고 밝혔다.
과거 에스와티니에서의 봉사 활동처럼 그의 자선 활동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헤이스팅스는 올해 1월 11억달러(약 1조5125억원) 규모의 회사 주식 200만 주를 기부했다. 이 재단은 지역 내 빈부 격차를 줄인다는 명목을 내걸고 활동하고 있다.
헤이스팅스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서류를 인용해 200만주를 미공개 법인에 증여했다. 그가 기부 과정에서 SEC에 제출한 서류에 포함된 실소유권 변경 명세서에서 거래 코드는 ‘선의의 선물’을 의미하는 ‘G’로 표시됐다고 미 CNBC방송은 전했다.
[헤럴드경제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