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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육아와 회사 업무를 병행하다 스트레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사안에 대해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약관상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예외적으로 망인에게 정신질환이 있었던 경우 지급이 가능한데, 대법원은 ‘예외’에 해당한다고 봤다. 망인이 생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았어도 마찬가지라고 판시했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대법관 오경미)는 망인 A씨의 유족이 보험사 5곳을 상대로 “보험금 2억여원을 지급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이같이 판시했다. 앞서 2심은 유족 측 패소로 판결했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2심 판결을 깨고, “다시 판단하라”며 사건을 창원지법에 돌려보냈다.
민간 방산업체에서 근무한 A씨는 2018년 2월, 야근을 하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집으로 귀가했다. 20분 뒤 A씨는 퇴근 당시 복장 그대로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했다. 유서는 없었다. 조사 결과, 당시 A씨는 업무량이 폭증했다. 7개월간 누적된 연장 근무시간이 총 533시간이었다. 육아 휴직도 거듭 밀리고 있었다.
A씨의 유족은 그의 남편과 당시 7살, 3살이었던 두 자녀 등 이었다. 이들은 보험사에 보험금 지급을 청구했지만 거절 당했다. 보험 약관상 ‘자살 면책약관’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원칙적으로 피보험자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단, 망인이 심신상실·정신질환 등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면 예외적으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보험사는 A씨가 예외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결국 사건은 법원으로 왔다.
유족 측에선 “A씨가 비록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더라도, 과중한 업무와 육아문제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누적된 것”이라며 “심신상실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예외적으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보험사 측에선 “A씨가 극단 선택을 했으므로 약관상 보험금 지급 의무가 면책됐다”며 “A씨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보긴 어렵다”고 반박했다.
1심은 유족 측 손을 들어줬다. 1심을 맡은 창원지법 전주지원 박재철 판사는 2020년 6월,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1심 재판부는 “망인이 과도한 업무로 일상적인 야근을 하고 있었다”며 “특히 본인의 업무 분야가 아닌 전산시스템 개발 업무를 동시에 수행했고, 시스템 오픈이 지연돼 문책을 받는 상황까지 발생했다”고 봤다.
이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자녀를 돌보기 위해 신청한 육아휴직도 전산시스템 오픈 문제로 연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며 “동료들에게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결정할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에 화가 나고 죽고싶다’고 말하기도 했다”며 유족 측 손을 들어준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2심에선 보험사 측 승소로 판결이 뒤집혔다. 2심을 맡은 창원지법 3-3 민사부(부장 김민정)는 2021년 11월, “A씨가 정신질환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칙적으로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A씨가 평소 건강했고, 정신질환 등으로 진료를 받은 적도 없다”며 “주변 사람들에게 ‘죽고 싶다’고 말한 사실은 있으나 이것만으로 우울증 등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이어 “A씨의 사망 직전 상태에 대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하는 의사의 진단서나 소견서가 제출되지도 않았다”고 덧붙였다.
2심 판결은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혔다. 대법원은 “원심(2심)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망인이 생전에 우울증 진단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법원은 사망한 사람의 성행과 경위, 주변에 남긴 말, 주변인들의 진술 등 자료를 토대로 망인의 정신질환 여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A씨가 상당한 업무스트레스를 받은 사실과 육아휴직이 미뤄진 사실, 당시 피로와 집중력 감소, 식욕 감소와 수면 장애 등 증상이 나타난 사실 등이 확인된다”며 “그럼에도 보험금 지급 청구를 기각한 원심 판단엔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원 판결 취지에 따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A씨의 유족은 4번째 재판에서 승소할 것으로 보인다. 그간 유사 사건에선 망인이 생전에 정신과 진료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험금 지급이 기각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앞으론 법원의 심리적 부검 등을 통해 보험금이 지급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