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비즈] ‘실리콘밸리 탄생’ 뒤의 수요와 공급

인공지능(AI)의 대두와 함께 실리콘밸리 생태계가 다시금 주목받으면서 기업·정부 관계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게 되는 2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는 ‘실리콘밸리의 시작과 그 배경은 무엇인가’, 둘째는 ‘실리콘밸리와 같은 혁신 클러스터, 또는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벤치마킹해야 하나’이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널리 통용되는 대답으로 ‘벤처기업의 시초’ HP(휴렛패커드)의 설립(1939년)을 꼽을 수 있다.

현재도 HP가 사업을 시작한 차고지는 ‘실리콘밸리가 탄생한 장소’(Birth place of Silicon Valley)라는 이름으로 캘리포니아주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이 과정에서 HP를 뒷받침했던 스탠퍼드 대학이 언급되기도 한다.

혁신을 추구하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기업들은 HP와 같은 실리콘밸리 주요 기업이나 스탠퍼드 대학같은 실리콘밸리의 유명 대학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생각하곤 한다.

‘혁신 공급자’라는 측면에서 대학과 기업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필자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실리콘밸리의 뒤에 있던 수요를 이야기하고 싶다. 이는 실리콘밸리에 엮인 역사적인 사건들과 연계돼 있다.

HP가 설립되기 약 90년 전인 1848년. 미국은 골드러시 열풍과 멕시코-미국 전쟁으로 많은 자원과 영토, 많은 인구를 얻게 됐다. 미국은 새로운 지역의 치안 그리고 방위를 위한 힘이 필요해졌다.

현재 실리콘밸리가 자리 잡은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은 방어와 조선업에 최적화된 지형이었다. 미국은 이 지역에 서부 최초의 해군기지를 설립(1854년)했고, 군수산업(1859년)의 꽃을 피웠다. 이를 뒷받침할 인재 양성도 시작했다. 1868년 캘리포니아 대학(UC), 1891년에는 스탠퍼드 대학이 각각 문을 열었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1939~45년)이 발발하면서 군수산업 특수가 발생했다. 미국 전체 군수 계약의 약 12%가 캘리포니아에 집중됐고, 항공과 조선 계약 절반 이상이 샌프란시스코만에서 진행됐다. 캘리포니아대학과 스탠퍼드대 등 실리콘밸리 대학들은 국방 프로젝트를 통해 컴퓨터·통신·원자력 분야에서 기술을 쌓았다.

HP도 본래는 음향 장비를 제작한 회사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장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사용된 음파탐지기·레이더·무전기 등을 통해 이뤄졌다.

이렇게 반세기를 거치면서 혁신 기술의 확산은 반도체와 IT 기업의 등장을 낳았다. 결국 수요와 그에 대응한 공급의 조화가 현재의 실리콘밸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 과정을 지형적인 특성, 시대적 배경 등에 따른 ‘우연’의 산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정부의 수요 창출과 이에 대응한 대학과 기업의 기민한 대처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국내외 불안정한 정세와 신기술의 확산 속에 모두가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새로운 투자에 앞서 성공한 지역·기업에 대한 분석도 중요하나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환경)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미래 수요를 포착하고 대응하려는 노력과 자세가 아닐까.

김태룡 코트라 실리콘밸리 무역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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