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이 된 ‘日 제국주의’ 날카로운 고발

영상 설치 작품 ‘호텔 아포리아’(2019). 이정아 기자

칠흑 같은 어둠과 다다미가 깔린 네 개의 작은 방.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 자살 공격에 나선 일본 ‘가미가제(神風) 전투기’가 내는 요란한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이내 방 안쪽에 설치된 스크린에 시선이 닿는다. 재생 중인 영상은 ‘후쿠짱’ 캐릭터로 유명한 만화가 요코야마 류이치(1909~2001)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화면에는 군복을 입은 후쿠짱이 마치 놀이 삼아 전쟁을 벌이는 것 마냥 친근하고 귀여운 동작으로 포를 쏜다. 그런데 다시 보니 눈, 코, 입이 지워져 있다. 이윽고 기괴한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방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저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정치의 문제입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는 누가 제 만화를 보고 참전하기로 결심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서 호추니엔(48·사진)의 첫 한국 개인전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가 8월 4일까지 열린다. 전시의 백미는 2층에 설치된 영상 작품 ‘호텔 아포리아’. 2019년 일본 아이치 트리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인 작업으로, 작가는 요코야마가 만든 ‘잠수함과 후쿠짱’과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1903~1963)가 제작한 ‘만춘’을 편집했다. 두 영상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된 일본인 예술가가 만든 선전물이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 호추니엔은 “과거에 해소하지 못한 트라우마를 마주해 다루지 않으면, (이 트라우마는) 우리의 현재를 억누르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해결하지 않은 문제는 분명 미래에도 다시 마주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싱가포르 출신인 그가 일본의 제국주의를 작품에 전면으로 드러낸 이유다. 그래서 그는 예술가이지만, 동시에 역사가다.

호추니엔이 다루는 역사는 사실 자체에만 함몰되지도, 그렇다고 주관 속에서만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는 직접 수집한 방대한 데이터를 다시점으로 연출한 작품을 통해 집요하게 고발한다. 해방 이후에도 마치 유령처럼 존재한 일본의 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나타나는 ‘혼종적 근대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이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시아는 일본이 꿈꾼 패권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도 전한다.

이러한 관점을 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호추니엔은 일본인 큐레이터·번역가, 드라마투르그 등과 수집된 자료와 기록을 연구하며 글을 주고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작성한 스크립트는 편집된 선전 영상들과 함께 다소 섬뜩한 목소리로 읊조려진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이 아시아에 남긴 거대한 단층선을,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으로 보지 않기 위한 그의 다층적인 시선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는 “역사는 결국 인간을 보여주는 하나의 수단(form)”이라며 “그래서 역사는 결국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인간의 삶”이라고 했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유명 작가, 철학자, 시인, 화가, 사진가, 영화감독, 배우 등 150명이 넘는 이른바 ‘일본의 문화인’이 일본군의 선전 부대에 동원됐다. 그들은 일본의 동남아시아 점령 지역에서 문화 정책을 실행했다. 당시 철학자 미키 기요시(1897~1945)는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는데, 이는 곧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으로 대체됐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전쟁을 ‘피하거나’, ‘끝낸다’고 표현할 때 미국과의 전쟁만을 말하는 것 같았다.” 호추니엔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메시지는 이처럼 명징하다. 특히 그는 영상 속 인물들의 얼굴을 의도적으로 지운 이유에 대해 “비워 놓은 얼굴은 그 자체로 스크린이 된다”며 “우리는 그곳에 자신을 투사할 수도 있고, 과거를 데리고 와 현재에 있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관람료는 성인 기준 1만원.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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