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 “대책없이 해맑고 철없는 엄마…무대에 나를 던졌다”

연극 ‘벚꽃동산’을 통해 2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전도연 [LG아트센터 제공]

원하는 것은 언제나 손에 넣었던 ‘한국형 재벌 3세’에 ‘금쪽이’. 두 딸을 둔 중년이지만, 외모도 책임감도 누가 엄마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다. 트렌치코트, 트레이닝복, ‘힙해’ 보이기까지 한 운동화를 신고 어릴 적 추억에 빠져드는 송도영. 5년 만에 만난 아들의 과외 교사를 보고 깜짝 놀라 하는 말.

“당신은 세월을 비껴가지 못했군요. 나는 비껴간 것 같은데….” 객석에서는 이내 웃음이 터진다. ‘자아도취식’ 해맑은 조롱 화법이었으나, 어쩐지 틀린 말 같지도 않아서다.

연극계에 ‘생태계 교란종’이 등장했다. 유달리 작은 얼굴 탓에 맨 뒷 열 관객은 “이목구비 식별이 최대 난관”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지경이다. 4일 개막한 ‘벚꽃동산’(7월 7일까지·LG아트센터)을 통해 2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전도연(51) 이야기다.

연극이 한창인 서울 강서구 마곡동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최근 만난 전도연은 “스스로 이 선택을 한 것에 대해 원망스러울 정도로 무서웠고, 도망치고 싶었다”며 첫 공연 직후의 심경을 밝혔다.

직접 지은 이름 ‘도영’…딸 ‘썸남’에 키스하는 엄마

50대, 여전히 아름답지만 ‘전성기’는 지났다는 생각에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남자를 향한 ‘플러팅’이 몸에 밴 여자, 가슴 깊은 상처로 ‘알코올 중독’에 빠졌어도 마냥 해사한 사람, 도산 위기에도 “다 잘 될거야”라며 대책 없는 여유와 긍정이 넘쳐나는 인물, “열 여섯에 아버지에게 집을 선물받은” 클래스가 다른 계급. 전도연에게 ‘벚꽃동산’ 도영은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였다.

“제일 이해하기 힘든 건 자신의 상처를 왜 딸들에게 전가시키냐는 점이었어요.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어떻게 표현해야 관객을 납득시킬 수 있을지 많이 고민했지만,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답을 주진 않았어요. 연기를 하면 느껴질 테니 ‘맑은 영혼’을 표현하라고 하더라고요.”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유작 ‘벚꽃동산’이 세계적인 연출가인 스톤과 만나자 ‘한국형 재벌 드라마’가 됐다. 전도연을 비롯해 박해수, 손상규, 최희서 등 배우들은 올해 1월 스톤과 1주일간 워크숍을 하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대본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스톤이 늘 해왔던 제작 과정의 첫 단계다.

스톤은 이 기간 한국의 사회·문화·정서, 배우들의 이야기, 각자의 캐릭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나눴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때 ‘벚꽃동산’은 익히 알려진 고전의 골격만 남기고 전혀 새로운 ‘현대극’으로 매만져졌다.

전도연은 “그 기간 동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고, (스톤은) 각각의 배우를 투영해 글을 썼다”며 “지금의 ‘벚꽃동산’이 참 마음에 든다”고 했다. ‘도영’이라는 이름은 전도연이 직접 지었다.

대본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당혹스럽기는 했다. 도영이 큰 딸의 ‘썸남’에게 도발하고, 감정에 취해 둘째 딸의 연애 상대에게 키스까지 해버리기 때문이었다. “대체 사이먼(스톤)은 나한테서 뭘 본 거지 싶더라고요. (웃음) ‘100% 나’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가장 가까운 인물들을 투영해 태어난 인물이 도영이에요. 전도연 식의 표현을 해보라기에, 기술적으로 연구하면 늪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 느끼는 것에 충실하며 연기했어요. 나를 던지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매일 변화와 자극…“연기 뽐내려 돌아온 것 아냐”

35년 차 배우지만, 오랜만에 하는 연극은 매순간 새로운 경험이었다. 10년 전 드라마 현장에서나 존재했던 ‘쪽대본’이 배우에게 전달되는 것이 꽤 생소했다. 연습 과정에 돌입하면 그때부터 대본을 쓰기 시작, 연습 현장에서 ‘실시간 수정’을 거치며 작품을 매만져 나가는 것이 스톤의 스타일이었다.

아시아에서 첫 작업인 한국판 ‘벚꽃동산’은 스톤에게도 새로운 시도였다. 4월 초 2주에 걸쳐 대본이 전달됐다. 완전히 쪽대본은 아니었던 셈이다. 스톤이 10페이지 분량의 대본을 써서 넘기면, 드라마투르그(극작가·연출가를 돕는 예술 컨설턴트) 이단비가 번역, 우리말을 입혀 완성한 뒤 줌을 통해 배우들과 리딩을 시작했다,

전도연은 “모든 배우가 캐릭터에 대해 숙지하고 들어가지 못했다”며 “불안정 속에서 배우가 각자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찾아가길 바란 것이 사이먼의 연출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이 같은 연출 방식이 ‘흥미로운 자극’이 됐다.

“처음엔 대본이 나오지 않아 컴플레인(항의)도 했는데, ‘그게 나의 스타일이야. 난 원래 이렇게 일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한두 시간 전에 나올 수도 있다고요. 대본을 받고선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못했어요. ‘이러려고 쪽대본을 주나’ 싶었는데 나중엔 다들 ‘글을 참 잘 쓴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매일 같은 대본으로 같은 연기를 하지만, 전도연은 “매일의 무대가 다르다”고 했다. 배우들의 컨디션, 그날의 온도와 공기는 매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 그때 달라 새롭다는 것이 연극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 안에는 실수도 있고 두려움도 있다.

그는 “사람은 실수를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된다”며 “전 완벽주의자라 실수를 두려워하는데, ‘벚꽃동산’을 통해선 완벽하고 싶지만 완벽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무대로 돌아온 그에게 ‘역시 압도적’이라는 찬사가 나오지만, 정작 전도연은 그저 담담하다.

“연기 잘한다고 뽐내고, 보여주려고 했다면 무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예요. 무대 위에선 온전히 나를 던져야 하니까요. 나를 내던지는 용기가 필요했어요. ‘역시, 잘하더라’는 말은 자극이 되지 않아요. 그저 매일의 두려움을 이겨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요.”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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