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의 루푸르 원자력 발전소 부지 밖에서 근로자들이 일하는 모습. 근로자들. [AP] |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가스와 석유에 대해 서방의 제재를 받자 원자력 기술을 이용해 자금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개발도상국이 추진한 원전 사업에 대한 건설과 비용을 지원하는 대가로 해당 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일(현지시간) 러시아가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 기술 사업을 펼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국영 원전 기업 로사톰을 이용해 아프리카, 아시아 및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을 사업 파트너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며 “실제로 알렉세이 리하체프 로사톰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2016년부터 2022년까지 짐바브웨, 말리, 부르키나 파소 및 브라질을 포함한 아프리카 및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을 방문하면서 24개에 가까운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러시아는 주요 지정학적 협상 도구로 자국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와 석유를 활용했다. 그러나 우크라 전쟁 이후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산 석유, 천연가스 등에 제재를 걸면서 러시아가 원자력 기술을 이용해 사업 확장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러시아는 원전 수출 규모에서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인도, 이란, 이집트 등 전 세계에서 건설 중인 신규 원자로의 3분의 1 이상에 관여하고 있다.
러시아는 튀르키예에서 첫 원자력 발전소인 ‘아쿠유’ 원전을 건설하고 있으며 올해부터 전력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가나에서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위한 입찰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에는 우즈베키스탄에 소용량 원전을 건설하는 협정에도 서명했다. 이는 중앙아시아 최초의 원전이 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서방 제재 속에서도 러시아가 에너지뿐 아니라 고급 기술을 수출하는 주요 사례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유럽에서도 러시아가 완전히 봉쇄된 것은 아니다. 헝가리의 경우 자국 유일 원전 단지에 러시아산 원자로 2기를 추가 건설하기로 하면서 로사톰에 신규 원자로 2기 건설 허가를 발급한 바 있다.
특히 자금력이 약한 개발도상국을 상대로 원전 사업 계약을 체결해 이들 국가로부터 자금을 끌어들이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는 2025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루푸르 원자력발전소 사업을 진행 중인 방글라데시의 경우 로사톰과 계약을 맺고 총사업비 120억달러 중 90%를 지원 받고 있다. 러시아 최대 국책은행인 대외경제은행(VEB)은 10년 뒤 상환을 조건으로 해당 프로젝트의 사업비 113억8000만달러(약 15조8100억원)의 대출을 승인했다. 향후 대출금 상환을 이용해 러시아가 영향력을 펼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 환경 단체 에코데펜스의 블라디미르 슬라비야크 공동의장은 “이러한 호의적인 조건은 신용등급이 낮은 국가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들 국가는 다른 곳에서 이만큼의 자금을 확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공격적인 원전 사업 확장에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뒤늦게 제재에 나서는 실정이다.
지난달 13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 영토 내부 또는 러시아 관련 단체에서 생산된 미조사(未照射)·저농축 우라늄 수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법안에 서명했다. 미조사 우라늄은 플루토늄 등 방사성 물질 함유량이 기준치 이하인 우라늄으로, 원자력 발전의 원료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