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걸리버 여행기’ 스틸컷 [20세기폭스코리아]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누구나 ‘걸리버 여행기’를 안다. 그러나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다. 걸리버가 소인국과 거인국 세상을 여행하는 이야기만 알고 있다면, 딱 반쪽만 아는 셈이다. 목숨을 걸고 모험을 떠난 걸리버의 긴 여행은 ‘말(馬)’의 나라인 후이늠에 다다라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거짓말, 불신, 전쟁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세계, 한 마디로 “대환장 파티”가 없는 그곳이 바로 후이늠이다.
소설가 김연수(54)가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를 한국 현실에 맞춰 다시 썼다. 걸리버 여행기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판된 해는 1909년. 당시 육당 최남선이 소개한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국과 대인국을 축약적으로 다룬 1·2부로 구성됐다. 그런데 김연수는 육당이 번역·번안하지 않은 두 나라인 라퓨타와 후이늠까지 붙여 4부작에 이르는 걸리버 여행기를 현대적으로 해석했다.
김연수는 걸리버 여행기 유럽 판본에서 표기한 ‘한국해’(Sea of Corea)가 ‘홍길동전’에서 말하는 이상 국가 율도국이 위치한 곳이라는 점을 착안해 재치 넘치는 장면을 더했다. 걸리버가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항구에 들른 조선인들을 만나는데, 이들의 우두머리가 홍길동인 것. 언어와 감옥, 죽음이 없는 ‘3무(無)’ 율도국에서 온 조선인들을 만난 걸리버라서, 그의 여행기는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걸리버 여행기’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말의 나라, 후이늠. |
그런데 이쯤 되면 질문이 생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 소설가 김연수는 부패한 영국을 통쾌하게 공격한 300년 전 작품을 왜 지금 다시 쓴 것일까. 그리고 왜 후이늠인가.
이런 의문은 책을 읽다 보면 ‘아’ 하는 짧은 탄성과 함께 풀린다. 걸리버 여행기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권이 없는 땅에서 인간 욕망이 더는 부질없음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걸리버 여행기에는 풍부한 상징과 은유와 함께 뼈 때리는 조언도 가득하다. 절망의 굉음이 전 세계에 울려 퍼지는 요즈음, 신랄한 각성이 아닐 수 없다.
“상상해보라. 그 모든 멍청한 짓거리들이 사라진 세상을.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 유가 폭등, 기후 위기, 온실가스 배출, 보이스 피싱, 전세 사기, 악플, 왕따, 학교 폭력, 노동 착취, 돈에 미친 자들이 없는 세상을. 그것들은 원래 없었던 것이니 앞으로도 없어질 것들이고, 나는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걸리버는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서로를 이웃처럼 대하는 후이늠을 그리워한다. 배신하는 친구도, 뇌물을 줘야 움직이는 고위직 공무원도, 정치인도, 소매치기도, 잔소리꾼도, 더 나아가 내 몸을 망치는 의사와 내 재산을 털어가는 변호사도 없는 그곳. 그야말로 거짓과 교만과 허세와 경쟁이 없는 그 세계의 지혜는 이렇듯 간단하게 요약된다.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하는 대신에 가진 것을 원한다면, 너는 언제나 만족하리라.’
걸리버가 말하는 인간 혐오의 근거가 오늘날 우리가 염증을 느끼는 지점과 정확하게 일치해 더욱 뜨끔하다. 특히 후이늠보다 열등한 야후의 존재는 자기중심적 선언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한 발 떨어져서 보게 만드는 지점이다. 야후는 “자연이 창조한 동물들 중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럽고 기형적”이며 “한 줌의 이성으로 착하지 않은 짓에만 골몰하는 족속”이자 “어떤 진실이 있는지 몰라서 거짓말을 하면서도 거짓말인 줄 모르는”, 바로 인간 종족이다. 야후의 세계는 과연 진보하긴 할까, 고개가 갸우뚱 해질 즈음 걸리버는 “야후의 세상은 이제 바뀌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안타깝지만, 300년 전 조너선의 고백은 지금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럼에도 김연수는 이 지점에서 어떤 가능성을 봤다. “당시 조너선이 인간에 대해 깊이 절망했지만, 오래전 멸망했을 인간 사회가 현재까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적이기도 하다.”
작가가 걸리버 여행기를 다시 쓴 이유는 분명 인간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살 만하다는 소망에 기인했을 것이다. ‘지금 여기’의 관점에서 새롭게 그려낸 걸리버 여행기는 26일 개막한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처음으로 소개된다. 올해 도서전의 슬로건이 바로 후이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