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도광산 내 터널. [연합] |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이 2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동의 전체 역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요구사항을 수용하면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인 한국이 반대표를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컨센서스(만장일치)로 결정됐다.
다만 2015년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군함도(하시마) 탄광의 세계유산 등재 당시 일본이 조선인 강제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행하지 않은 전례가 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전쟁 범죄의 현장을 두 차례나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과정을 한국 정부가 막지 못했다는 비판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인 사도광산 인근의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서 배포되는 안내 브로슈어. |
▶韓정부, 사도광산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동의=27일(현지시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제46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사도광산은 16세기에 금맥이 발견된 이래 19세기까지 세계적인 규모의 금광으로, 일제강점기에는 1500여명의 조선인이 끌려가 혹독한 강제노역에 시달린 전쟁 범죄의 현장이기도 하다.
외교부는 “우리 정부는 ‘전체 역사’를 사도광산 ‘현장에’ 반영하라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의 권고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일본이 성실히 이행할 것과 이를 위한 선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전제로 등재 결정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세계유산위원회는 21개 위원국 중 ‘기권’을 선언한 국가를 제외하고 투표 참여국 중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등재를 결정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관례적으로 컨센서스 방식으로 결정한다. 우리 정부가 반대를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만장일치로 등재가 결정됐다.
일본 정부는 2018년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추진 후보로 선발하려다 강제동원 역사 논란을 우려해 보류했다.
그러나 2022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한국과의 역사 전쟁을 피해선 안 된다며 세계유산 후보로 추천했고, 일본 정부는 2023년 2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에도시대(17~19세기)에 한정해 신청서를 제출해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 시기(20세기)는 제외해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지난 6월 이코모스는 “광산 개발 기간에 걸친 지정 유산의 전체 역사를 종합적으로 반영하고 국제, 국내 및 지역 청중을 대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권고했고, 일본이 이 권고사항을 모두 수용하면서 세계유산위원회는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가 100% 만족해서 등재에 동의한 것이 아니다”며 “지금까지의 한일 협의 결과와 우리가 끝까지 반대할 경우 다른 국가들이 투표에서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인지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니가타현 사도광산 인근에 위치한 아이카와 향토박물관(니가타현 사도시 아이카와 사카시타마치 20). 박물관 일부에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생활' 전시가 이뤄진다. |
▶日 “매년 사도광산 노동자 위한 추도식 개최”=외교부는 정부가 등재에 반대표를 행사하지 않은 이유로는 ‘전체 역사’를 반영하라는 이코모스의 권고와 우리 정부의 입장을 일본 정부가 모두 수용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밝혔다.
이날 열린 회의에서 일본 정부측 대표인 카노 타케히로 주유네스코 일본 대사는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를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해석과 전시 전략 및 시설을 개발할 것”이라며 “사도광산의 모든 노동자, 특히 한국인 노동자를 진심으로 추모한다”고 밝혔다.
카노 대사는 “일본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처했던 가혹한 노동환경과 그들의 고난을 기리기 위한 새로운 전시물을 사도광산 현장에 이미 설치했고, 향후 사도광산 노동자들을 위한 추도식을 매년 사도섬에서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전반적으로 일본 정부의 이행 의지가 여러 차례 강조돼 있으며,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행하겠다는 부분까지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며 “과거의 모든 약속을 명심하면서 이행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2015년(군함도 등재 당시) 일본이 한 약속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가 밝힌 실질적인 이행조치는 전시와 추도식이다.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내 총 5개 전시실 중 일부에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생활’이라는 전시 공간을 오는 28일부터 개장한다.
전시에는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 및 기타 관련 조치들이 한반도에서도 시행됐고, 초기에는 조선총독부의 관여하에 ‘모집’, ‘관 알선’이 순차적으로 시행됐으며 1944년 9월부터는 ‘징용’이 시행돼 노동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작업이 부여되고 위반자는 수감되거나 벌금이 부과됐다는 내용을 전시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바위 뚫기, 버팀목 설치, 운반과 같이 갱내 위험한 작업을 더 많이 했다는 기록과 노동 조건에 대한 분쟁과 식량부족, 사망 사고에 대한 기록, 한국인 노동자의 한 달 평균 노동일이 28일이었다는 점, 한국인 노동자들의 탈출과 수감 기록도 전시됐다.
외교부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어떤 과정으로 오게 됐고, 노동자 규모가 어느 정도이며, 이들의 생활과 노동환경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보여주는 역사 자료들이며, 현재는 공터로 남아있으나 한국인 노동자들이 생활했던 기숙사 등 직접적으로 관련된 장소에는 안내판이 설치되고, 안내자료 등을 통해서도 해당 장소가 소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올해부터 매년 7~8월쯤 사도광산 노동자들을 위한 추도식이 현지에서 개최된다. 외교부는 “올해 개최 일자와 장소는 현재 일본 내에서 조율 중이며 우리와도 협의 중”이라며 “그동안 일본의 민간단체 차원의 추도식은 종종 있었으나, 이번에 일본이 약속한 추도식은 일본 정부 관계자도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하시마. 이른바 군함도. [연합] |
▶군함도 이어 사도광산도 막지 못한 韓정부=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 군함도에 이어 이번 사도광산까지 일본이 강제동원 역사 현장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2015년 군함도 등재 당시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사안이었던 ‘전체 역사를 알려야 한다’는 내용을 일본 정부가 이행하지 않은 전례가 있다.
특히 한국은 지난해 신규 위원국에 당선돼 올해부터 2027년까지 위원국으로 활동, 최종 심사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데 ‘반대’표를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등재를 찬성했다는 점도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전체 역사를 기술해야 한다’는 정부의 일관된 요구사항에 대한 일본 정부의 조치가 ‘충분하다’는 국민적 여론을 수렴했느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앞서 국회는 25일 본회의에서 ‘일본 정부의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추진 철회 및 일본 근대산업시설 유네스코 권고 이행 촉구 결의안’을 채택했다. 사도광산의 세계유산 등재 추진 자체를 반대하면서 과거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진정한 반성과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했다.
외교부는 “정부는 일본이 이번에 사도광산에서 선제적으로 이행 조치를 취하기로 한 취지를 살려, 사도광산 관련 전시에 있어 약속을 계속 이행하고 도쿄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의 미흡한 부분에 대한 개선을 포함해 진정성 있는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한일 관계 개선의 흐름을 계속 이어 나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