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김정은도 울고갈 ‘자기애’ 美나르시시즘의 결정판 될까 [이형석 칼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린 위시콘신주 밀워키 파이서브포럼에서 자신의 이름이 조명으로 커다랗게 빛나는 무대에 등장해 있다. [AP]

“아시다시피 암살자의 총알이 4분의 1인치(6㎜가량)만 비껴가지 않았어도 저는 죽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데, 저는 오늘 정확히 말씀드리겠지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것입니다. 말하기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8일 밤(현지시간)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린 위스콘신주 밀워키 파이서브포럼. 백색으로 빛나는 ‘TRUMP’라는 커다란 글자를 배경으로 무대에 등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은 암살 피격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것으로 미 공화당 대선 후보 수락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음악이 크게 흘러나오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이 어떻게 “끔찍한 그날 밤”으로 변했는지를 극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차트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는데 ‘휙’하는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정말, 정말 세게 나를, 오른쪽 귀를 때리는 것을 느꼈다”며 “나는 ‘와, 이게 뭐지? 총알일 수 밖에 없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는 “오른손을 귀로 가져갔다. 손은 피투성이가 됐다”며 “놀라운 점은 총격 전에 내가 마지막 순간 머리를 움직이지 않았다면 암살자의 총알이 완벽하게 명중했을 것이고 나는 오늘밤 여기 있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사방이 피였지만 신이 내 편이 되어서 매우 안전하다고 느꼈다”고도 했다.

퓰리처상 수상 경력의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는 이날의 전당대회를 묘사한 19일자 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최대한 원초적이고 어둡게 연출된 무대 효과 속에서 메시아같은 분위기와 절제된 억양으로 자기가 겪은 비극을 이야기했다”고 했다. 트럼프는 무대에서 고(故) 코리 콤페라토레 소방관의 헬멧에 입을 맞췄는데, 이를 두고 모린 다우드는 “트럼프는 수년 동안 자기 신화화 영웅의 여정을 겪어왔고, 마침내 그 여정은 키스로 봉인된 이야기를 갖게 됐다”고 했다.

트럼프가 지난 13일(현지시간)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열린 유세 중총탄에 맞아 귀에 피를 흘리는 채주먹을 불끈 치켜들고 있다. [AP]

▶미국의 집단정신과 트럼프의 나르시시즘=트럼프의 연설은 93분간 이어졌고, 이는 역대 미국 주요 정당 대선후보 가운데 가장 긴 수락 연설로 기록됐다. 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되찾아 오겠다” 는 등 연설 중 ‘아메리카’ 또는 ‘아메리칸’을 합쳐 모두 52번 언급했다.

미국 정신의학자인 토마스 싱어는 지난 2017년 ‘트럼프와 미국의 집단정신’이라는 글에서 “근래에 트럼프만큼 미국인의 정신을 매료시킨 유명 인사는 없었다”며 “트럼프의 매력은 많은 미국인의 집단정신에 강하게 반향을 일으키는가 하면, 또 많은 미국인이 트럼프의 그런 특징을 역겨워한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그는 “트럼프의 나르시시즘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나르시시즘 욕구와 상처를 완벽하게 보상하는 거울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집단정신이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신성한 핵심 신념 또는 정체감’인데, 많은 미국인이 지금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기라는 공포에 휩싸여 있어 기회, 진보, 성공,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인의 집단 정신이 상처를 받았다. 이를 트럼프로부터 보상받으려 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백인이 우위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 세계에서 미국의 위상이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궁극적으로는 환경파괴와 이 세상 자체 대한 공포”를 미국 집단 자아가 느끼는 위기로 설명했다. 그는 “미국 집단정신에 트럼프의 허풍과 오만, 거만은 보상적 해독제를 상징할 가능성이 크다”며 “나는 내 나라를 제자리로 되돌려 놓고 싶다”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지지자들의 열망을 예로 든다. 트럼프가 두번째 집권을 노리며 전당대회에서도 거듭 외친 구호이기도 하다.

미국의 집단 자아와 트럼프의 나르시시즘의 일체화는 피격사건과 공화당 전당대회를 거치며 절정을 향하고 있다. 특히 이미지가 창조하는 환상에 기초한 문화와 광적인 유명인 숭배, 연결성이 강화된 미디어 환경은 그 어느 누구보다 ‘쇼맨십’에 능한 트럼프를 미국 나르시시즘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끔찍한 거짓말과 가스라이팅”vs “총격에 대한 감동적 묘사”=공화당 전당대회 평가는 엇갈렸다. 뉴욕타임스는 자사 소속 칼럼니스트와 기고자 11명의 평가를 10점 척도의 긍·부정으로 나누어 실었는데, 0~4점이 5명, 5점이 1명, 6~10점이 5명이었다. 긍정 평가로는 “총격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고 감동적인 묘사” “희생 소방관 헬멧에 키스했을 때 잊혀지지 않을 이미지를 만들었다” “당초 계획했던 연설문을 찢어버리고 대신 통합을 주제로 다시 쓴 것은 옳은 결정” “암살 피격 사건을 회상했을 때 일부는 설득력이 있었는데, 지금까지의 트럼프에게는 느껴보지 못한 진정한 감사의 태도가 보였다”는 등의 언급이 있었다.

그러나, 부정 평가는 신랄하고 냉소적이었다. “전당대회에서의 모든 거짓말과 가스라이팅에 질식할 뻔 했다, 그들(공화당)은 모두 트럼프가 곰인형이지 회색곰이 아니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했다” “피격 사건 회상 이후의 연설은 우리 시대의 진정으로 끔찍하고 자기만족적인 정치적 공연 중 하나로, (트럼프의) 나르시시즘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등의 지적이 나왔다. 심지어 “모든 정치적 이벤트는 우상숭배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광신도같은 지지자들의 연설은 지나치게 비굴한 아첨으로 가득차 만약 북한 행사였다면 김정은조차도 ‘동지들, 좀 자제해주시지’라고 했을 것”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이 사진은 조 로젠탈이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 일본 이오지마섬에서 촬영한미 해군병사들의 성조기 게양 장면(윗쪽)을 떠올리게 한다.삼각형의 구도와 펄럭이는 성조기가 사진 속 인물들의 시련과 영웅적인 풍모,‘미국의 승리’를 강조하는 이미지다. [AP]

▶록키, 처칠, 영웅, 순교자, 그리고 미국의 메시아 트럼프=미국 유명언론인 크리스 헤지스는 2009년 저서 ‘미국의 굴욕’에서 유명인 숭배에 기초한 미국의 대중문화를 비판한다. 그는 “자아 숭배가 우리 문화 전반을 지배한다”며 “유명인 이미지들은 우리의 이상화된 자아를 유명인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우리에게 되파는 상품”이라고 했다. 또 “이미지에 기초한 문화는 이야기, 사진, 유사 드라마로 소통한다”며 “이미지의 포로가 된 사람들은 후보자가 어떤 느낌을 주는가에 기초하여 투표를 한다. 그들은 슬로건, 미소, 감지된 성실성, 매력 그리고 후보자가 신중하고 정교하게 만들어낸 개인 이야기에 따라 표를 던진다”고 했다. 크리스 헤지스는 “프로레슬링과 TV 리얼리티쇼, 토크쇼 등은 유명인들과 터무니없는 인물들의 현란한 삶을 우리에게 퍼부으면서 텅 빈 우리의 삶을 채워주겠다고 약속한다”며 누구나 스스로를 부와 미모, 명성, 행복,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잠재적 유명인이라 믿도록 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것을 ‘자아도취의 문화’라고 했다. 트럼프는 이 책의 완벽한 모델이다. 그는 2004년 NBC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의 진행자가 됐으며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는“이는 트럼프를 12년 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등극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했다.

미국의 이상화된 집단자아상과 나르시시즘은 트럼프의 이미지에 투영된다. 피격 직후 순간을 담은 AP통신의 ‘피흘리는 트럼프, 하늘로 치켜올린 주먹, 펄럭이는 성조기’ 사진은 트럼프에 전쟁 영웅, 핍박받는 순교자, 죽음에서 부활한 구세주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모린 다우드 칼럼니스트는 “암살 피격 사건으로 트럼프의 메시아 콤플렉스는 더욱 커졌다”며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원하는 표정을 지으며 연습하는 버릇이 생겨 본능적으로 시대를 초월하는 피투성이의 저항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이 사진은 제 2차 대전 중 종군 기자였던 조 로젠탈이 일본 이오지마에서 찍은 미 해병대의 ‘성조기 게양’ 사진을 떠올리게 만든다. 역경을 극복하고 승전한 미군을 상징하는 이미지다. 트럼프의 피격 사진은 공화당과 트럼프 진영의 홍보는 물론이고 전당대회를 장식하는 주요 이미지가 됐다.

트럼프는 2020년 대선결과 뒤집기 시도 관련 혐의로 형사 기소돼 지난해 8월 촬영한 머그샷(피의자 식별용 사진)도 ‘강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후원금을 모금하는 데 이용했다. 머그샷에 담긴 그의 표정은 마치 1941년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가 찍은 윈스턴 처칠을 닮았다. 트럼프가 의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대통령 취임 직전 백악관 공식 사진 촬영을 할 때 카메라를 노려보며 보좌진에게 ‘나는 처칠과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앞서 대통령 재임 중이던 2019년 11월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영화 ‘록키’ 포스터 속 상의를 탈의한 복싱 트렁크 차림 실베스터 스탤론의 근육질 몸에 트럼프 자신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을 올려 화제를 일으켰다. 당시 ‘건강이상설’과 의회 ‘탄핵 조사’에 맞선 대응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공화당은 마약중독인 홀어머니 슬하에서 가난과 폭력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러스트 벨트’(쇠락한 공업지대) 출신의 J.D 밴스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함으로써 ‘부와 거래의 화신’인 트럼프가 갖지 못했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완성했다. 트럼프에겐 저서 ‘거래의 기술’과 TV쇼 ‘어프렌티스’가 있었던 것처럼 밴스에겐 자서전과 동명의 넷플릭스 드라마 ‘힐 빌리의 노래’가 있다.

이제 미 대선은 트럼프와 카멀리 해리스 부통령간의 대결로 이뤄질 것이 유력해졌다. 여성·흑인·아시아계·진보파라는 정체성을 지닌 해리스 부통령은 미국 집단정신의 또 다른 거울이다. 미국민은 과연 어떤 ‘서사’와 ‘정체성’을 선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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