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연꽃 향 가득…무안 첫 보물이 된 삼존상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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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승달산 법천사 대웅전과 삼층석탑

불교 경전 내용 중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일 것이다. 불자들은 법회 때마다 대승 불교의 핵심 경전인 ‘반야심경’(반야바라밀다심경)을 요즘은 우리말로 외우고 있다.

“사리자(지혜가 높은 석가제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受想行識, 인간의 마음)도 그러 하니라.”

우주 만물의 현상 세계(色)는 일시적인 것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空) 것이니 집착과 분별을 떠나 그 실체를 꿰뚫어 보라는 것이다.

무안 승달산

중국 고전(古典) 중 세계 변화 원리를 다뤘다는 주역(周易)에는 ‘종즉유시(終則有始)’라는 말이 있다. ‘끝이 있으면 곧 시작이 있다’는 말로 모든 것은 무한히 이어져 있다는 자연의 순환 법칙으로 불교의 윤회설과도 상통한다.

전라남도 무안군에 와서 기행문을 쓰다 보니 뜬금없이 ‘반야심경’과 ‘주역’의 글귀들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우리나라 서남해안 끝자락에 위치한 무안 승달산과 그 주변을 돌며 ‘연꽃축제’와 ‘군공항 이전 반대’ 현수막이 교차해서 나부끼고 있지만 황량함이 느껴지는 시골풍경을 접한다. 끝자락은 곧 새로운 영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시작인데 아쉬움이 느껴진다.

높지 않은 산임에도 풍수지리학자들은 형세에 감탄하고 ‘노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예불하고 있는 형상’의 명당이 있다고 해 호남 팔대지 중 제일이라고 칭하고 있는 곳이 승달산이다.

이미 1500여 년 전 승달산에 서역 금지국(金地國, 지금의 미얀마 남부)에서 스님이 들어와 사찰을 창건했고 1000여 년 전에는 원나라 스님이 와서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은 일찍이 국제화 된 곳이다.

법천사와 목우암으로 가는 길목

옛날 뱃길 따라 서역에서, 중국에서 무안으로 왔듯이 승달산의 기운을 받아 무안 목포지역이 동아시아로 뻗어나가는 시작점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남 무안 끝자락 불교와 연이 있는 세 곳을 찾았다.

승달산 법천사와 목우암이 중심에, 우측에 백련 서식지인 회산 백련지, 그리고 좌측 바닷가엔 다신(茶神)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 탄생지가 삼각형 꼭짓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꽃 – 연(蓮)
승달산 산신각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일컫는 ‘화양연화(花樣年華)’는 두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을 그린 홍콩 영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라는 주제로 열리는 ‘연꽃 축제’ 장소 무안 회산 백련지 가는 길목 현수막에 쓰인 아름다운 글귀가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도 뜬금없이 튀어나와 놀랬다.

연꽃은 흙탕물 속에서 맑은 꽃을 피워 많은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줄 뿐만 아니라 잎, 줄기, 뿌리, 열매 모두가 유익하게 활용되는 식물이다. 고대 인도에선 연꽃은 여성성을 상징해 다산(多産), 생명창조, 풍요, 신성 및 영원 불사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연꽃 여신상(女神像)도 발견됐다.

무안 회산 백련지
회산 백련지 연꽃

이집트와 인도가 원산지인 연꽃은 7월부터 9월까지 피고 지기를 반복하고 청·황(홍)·적·백 등 4종의 연꽃색이 있다. 우리나라는 홍련이 대부분이며 백련은 청정, 순결, 정화 등의 의미로 꽃 중의 군자로 불리고 있다. 고구려 시대 인도 승려가 강화도 고려산에 5가지 색깔의 연꽃을 상징하는 백련사, 흑련사, 적석사, 황련사, 청련사를 지었다 하니 흑색 연꽃도 있는가 보다.

서울 조계사 연꽃

불교에선 부처님의 탄생을 알리려 연꽃이 피었다고 해 부처님이나 스님이 연꽃 대좌에 앉는 풍습이 생겨났다. 오염되지 않는 무집착의 마음을 표현한 연꽃은 단아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져 불가에서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꽃이 됐고 극락 세계를 신성한 연꽃이 자라는 연못이라고 생각해 사찰 경내에 연못이 많다. 7,8월은 연꽃의 계절이다. 서울 도심 조계사 경내에도 연못 대신 연꽃 화분을 가득 채워 지나는 길손에게 은은한 향을 선사하고 있었다.

목우암 전경

33만여㎡로 동양 최대의 백련 서식지라는 무안 회산 백련지에서는 연꽃 축제로 부산하다. 하얀 연꽃은 피고 지기를 반복하니 몇 개월 동안 화객들이 몰려들 것이다.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오묘한 법칙이 연꽃에 들어있어 ‘만다라(曼茶羅, 본질이 여러 조건에 의해 변한다)화(華)’라고도 하는데 중생이 원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상징하기도 한다. 회산 백련지 중간에 설치된 108 출렁 다리를 건너며 백팔번뇌가 끊어지길 소망하고 편안하고 즐거운 극락정토를 상상해본다. 편안함을 주는 힐링의 공간이다.

“외국 승려들이 득도하다” 승달산 목우암과 법천사
목우암 전경

바다를 접한 서남해안 끝자락에 위치한 승달산(僧達山)은 높이가 333m에 불과하지만 무안 인근에선 가장 높은 산이다 보니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찾는다. 승달산이라는 이름에서 풍기듯 설화도 있는데 승달산엔 승려가 부처님께 절하는 모습의 노령산맥 4대 명혈 중 하나가 있어 이 혈에 묘를 쓰면 98대(3000년)에 이르도록 문무백관을 탄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목포대학교가 승달산 자락으로 이전해 왔고 전남도청도 지근거리에 자리잡게 됐다.

이곳 승달산에 목우암과 법천사가 있다. 천년 고찰이지만 생소하고 아담한 사찰로 조계종 22교구 본사 대흥사의 말사다. 법천사(法泉寺) 이름처럼 물이 많은 곳인지 가는 길에 큰 저수지(감돈저수지와 달산저수지)가 두 개나 있고, 목우암(牧牛庵) 이름처럼 길목엔 여느 곳보다 많은 소 축사들이 즐비하다.

법천사 석장승

목우암과 법천사를 1㎞ 정도 앞둔 지점에 한 쌍의 석장승이 길 양편에서 맞아준다. 남장승의 코는 닳아 없어져 희미한데 동네 아낙네들이 아들을 얻으려고 코를 떼어다 갈아서 마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찰 입구 석장승은 사찰 경계를 표시하고 재액과 잡귀 등 부정한 것들의 사찰 침입을 막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무속과 불교가 어우러진 ‘석상신앙’ 이다.

법천사 석장승

얼마간 오르니 법천사와 목우암의 갈림길이다. 우측으로 850m 가면 목우암이고, 좌측으로 200여m 가면 법천사다. 법천사는 서기 553년 덕이 조사께서 영축산 자락에 창건했고, 725년 서역 금지국에서 온 정명스님이 중건하고 목우암을 창건했다. 고려 인종(1131~1162)때 원나라 임천사 원명(圓明)조사가 바다를 건너와 법천사를 중건하고 교세를 크게 떨쳐 그를 찾아온 제자 500여명이 한꺼번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 영축산을 승달산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목우암 극락보전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큰 가람이었으나 1896년 이후 폐찰이 되다시피 해 최근에 예전 명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목우암보다 규모나 안정성이 약해 보였다. 대웅전과 산신각을 먼저 중창하고 최근에 지장전을 건립하고 대웅전 앞 삼층탑을 세운 듯 보이는데 아직 사찰 전반이 듬성해 보인다.

목우암은 725년 서역 금지국에서 온 정명스님이 창건하고 고려 때 원나라 원명스님이 중건했다. 암자 이름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목우암 설화

바다를 건너온 원명조사가 꿈에 백운산(승달산 지맥) 총지사(정명스님이 창건한 절)에서 소 한 마리가 나와 이 암자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꿈에서 깨 가보니 계곡 바위에 소발자국 흔적이 있어 그 자리에 풀로 암자를 지으니 이것이 목우암이다.

목우암 극락보전 삼존불상

목우암에는 1896년 법천사가 폐사됐을 때 법천사 대웅전에 봉안됐던 삼존불상을 목우암 극락보전으로 옮겨왔고 최근에 보물로 지정됐다. 무안군에선 최초의 보물이다.

1681년에 만들어진 극락보전 앞 석등과 암자 초입의 고승들의 부도가 절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특이하게 축성각(祝聖閣)과 산신각이 한 건물 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암자 전체가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극락보전 마루에 걸터앉아 석등을 바라보며 승달산 능선 넘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를 듣고 있으니 시나브로 시름이 사라진다. 장마에 수량이 늘어난 암자 입구 계곡에는 물소리가 청량하다. 녹차 한 잔이 생각 나 초의선사를 만나러 간다.

다선 초의선사 무안에서 탄생하다
목우암 극락보전 앞 석등

초의선사에게 동다송(東茶頌)을 짓게 한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과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가 한강의 풍광을 즐기며 시를 짓고 차를 마셨을 삼정헌(三鼎軒)이라는 다실(茶室)이 경기 남양주 수종사(水鍾寺)에 있다. 삼정헌의 ‘삼정’은 삼정승(三政丞)에 빗대어 차를 좋아하는 세 사람을 일컫는 말로 차를 자신의 호로 쓴 ‘다산’과 정조의 부마 ‘해거도위 홍현주’, 차의 신선(神仙) ‘초의선사’를 말한다.

지금도 초의선사의 차 문화를 계승하고자 삼정헌에서는 무료로 직접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다. 강진 초당에 다산 정약용이 유배 와서 교류하고 있었던 인근 백련사의 혜장스님은 대흥사에 있던 초의선사(1786~1866)에게 다산을 소개시켜 차를 중심으로 정약용 및 서울의 명망있는 학자들과 교류하고 오랜 연을 갖도록 했다.

목우암

한국의 다성(茶聖), 다신(茶神)으로 일컫는 초의선사는 시(時), 서(書), 화(畵)에 능했고, 유학과 도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 우리나라 차 문화를 중흥시킨 조선후기 선승(禪僧)이다. 1786년 무안군 삼향읍에서 태어나 해남 대흥사에서 주로 지내면서 대흥사13대 대종사에 올랐고 조선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라는 호(號)를 하사받기도 했다.

목우암 초입 고승들의 부도

다산 정약용. 해거 홍현주. 추사 김정희 등 사대부들과 깊은 교분을 나눠 조선 후기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24살 많았던 정약용은 초의선사를 평하길 “남루한 옷 민둥머리에 중의 껍데기를 벗기니 유생의 뼈가 드러난다”라며 초의의 높은 학식을 평하기도 했다. 차의 경전이라는 중국의 다경(茶經)에 견줄만한 우리나라 차의 전문서 ‘동다송(東茶頌)은 초의선사가 정조의 부마 해거 홍현주의 부탁을 받고 썼으며 청나라 서적을 필사해 차 생활에 필요한 차의 지침서인 다신전(茶神傳) 등을 저술했다.

초의선사

초의선서는 ‘차(茶)와 선(禪)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고 차(茶)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 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통해 우리 차의 부흥을 이끌었다.

압해대교가 내려다 보이는 초의선사가 태어난 무안 삼향읍에는 ‘초의선사 기념전시관’과 ‘조선차 역사박물관’이 웅대하고 자리하고 있었다. 찾는 이들이 없이 한적하고 시간 여건 상 잠깐 조용히 둘러볼까 했는데 상주하는 문화해설사가 반갑게 맞이하며 문화 해설을 해주는 친절을 베푼다.

초의선사 생가터

초의 생가와, 대흥사 일지암을 복원해 뒀고, 용호 백로정, 초의 선원과 보제루 등 대형 수련 공간과 휴식 공간도 설치돼 있었다. 문화해설사 및 무안군에서 파견된 직원까지 상주하고 있어 제다 강의, 체험행사 등도 가능하다.

좋은 문화적 자원과 시설물을 많은 이들이 함께 공유하고 힐링의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관리되고 잘 홍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의선사 기념전시관

초의선사 다도정신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기리는 ‘초의 문화제’는 1992년부터 초의선사 입적일인 음력 8월 2일 해남 대흥사 일지암 일원에서 차(茶) 관련 단체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 무안군에서도 1997년 초의선사 유적지를 개관해 2004년부터 매년 음력 4월 5일 초의선사 탄생일에 맞춰 문화제를 개최해 올해 21회 행사를 진행했다.

해남과 무안에서 초의선사와 차(茶)는 중요한 문화적 자원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필자는 초의선사하면 먼저 떠오르는 곳이 남양주 수종사의 삼정헌이니 이 또한 어찌할꼬.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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