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 서핑 국가대표팀 감독 인터뷰]
“욱일기 보드에 국내 서핑 외면받을까 걱정돼 항의” KBS 서핑 해설위원 활동…인지도 높이는데 주력 카노아 등 국내 유망주와 2028 LA 대회 출전 각오
지난달 25일 호주 서핑 선수 잭 로빈슨이 SNS에 욱일기 문양의 서프 보드 사진을 올렸다. [잭 로빈슨 인스타그램 캡처] |
[헤럴드경제=안효정 기자·김민지 수습기자] “올림픽 경기에 ‘욱일기 보드’가 보이면 전국민이 서핑 종목 자체에 실망감을 느끼고 돌아설 것 같았어요.”
지난달 25일 호주 서핑 선수 잭 로빈슨(Jack Robinson)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욱일기 문양이 그려진 서프보드였다. 사진 아래에는 ‘(올림픽까지) 이틀 남았다. AI에게 영감을 받은 보드’라는 글도 올라왔다. AI는 2010년 작고한 전설적인 서핑 선수 앤디 아이언스(Andy Irons)의 이름 앞글자를 딴 것이다. 잭 로빈슨은 자신의 롤 모델인 앤디 아이언스가 생전 애용했던 욱일기 보드를 보고 본인도 비슷한 보드를 쓰고자 했다.
해당 게시물을 발견한 건 다름 아닌 송민 한국 서핑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송 감독은 잭 로빈슨이 욱일기 서프보드를 올림픽 경기에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한체육회와 함께 곧바로 호주 국가올림픽위원회(NOC)에 항의했다. 그 결과 호주 NOC는 개막식 하루 전인 다음날, 선수 측으로부터 ‘욱일기 보드를 경기에서 사용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해왔다.
송 감독은 최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올림픽 정신과 서핑에 대한 책임감으로 욱일기 보드가 전세계에 소개될 뻔한 사태를 막았다고 했다. 그는 “‘욱일기 보드’를 올림픽에 사용하려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세계인들이 즐기는 축제에서 특정 인물의 무지한 행동으로 한국이 과거의 아픔을 떠올릴 수 있지 않나. 그러면 안 된다고 봤다”고 말했다.
송 감독은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NOC에 항의한 배경을 외신에 직접 알리기도 했다. 한국의 역사와 욱일기의 의미를 모르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의 대응이 과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2일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욱일기 디자인은 한국인들에게 역사적인 상처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표현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송 감독은 욱일기 보드가 올림픽에 등장할 경우 서핑에 대한 국내 팬들의 관심이 커지기는커녕 반감만 생길 것을 우려했다. 그는 “대응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서핑 종목에서는 이런 일까지 생기네’ ‘정말 보기 싫다’ 등의 반응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게 너무 걱정됐다”고 했다.
2024년 4월 월드 롱보드 챔피언쉽 대회에 참석한 서장현 한국 서핑 대표팀 단장(왼쪽부터), 박수진 선수, 송민 서핑 대표팀 감독의 모습. [송민 감독 제공] |
▶국내 서핑 전도사…“한국인, 서핑에 유리한 신체조건 타고나”=송 감독은 현재 KBS에서 2024 파리 올림픽 서핑 경기 중계·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국내에서의 서핑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핑의 룰이 생소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경기를 친절하고 재밌게 풀어내 ‘인기 해설위원’으로 통한다. 누리꾼들은 그의 해설을 두고 ‘송민 위원님이 해설하면 새벽에라도 실시간으로 보고 싶다’, ‘해설이 금메달감’, ‘해설이 재밌어서 경기 보는 건 처음’ 같은 평가를 한다.
“서핑이라는 종목은 ‘스포츠의 아버지’라고도 볼 수 있어요. 서핑이 나오고 그 다음에 스케이트보드, 스노우보드 등이 나왔거든요.” 송 감독은 서핑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다고 자부했다. 그가 2020 도쿄 대회에 이어 올해 파리 대회에서도 해설에 나선 이유다. 3년 전에도 ‘똑같은 파도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기며 그는 서핑에 대한 지식과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서핑은 전 세계 195개국 이상에서 즐기는 액티비티다. 특히 미국과 호주, 인도네시아 등 태평양을 둘러싼 국가에서 인기가 높은 스포츠 종목 중 하나다. 아시아에서도 최근 급성장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거머쥘 정도로 성장했고 중국은 적극적으로 서핑 인재를 발굴·육성하고 있다.
반면 한국 서핑은 올림픽 2회 연속 출전 선수가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을 갖고 있다. 송 감독은 “국내에 서핑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해설밖에 없더라”며 “내 해설로 서핑에 대한 관심이 많이 올라가 선수들이 충분한 지원을 받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송 감독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서핑에 유리한 신체조건까지 갖췄다. 그는 “한국 선수들은 하체 길이가 서양 선수들에 비해 짧아 무게 중심이 낮고 버티는 힘이 좋다. 파도에 저항하는 서핑 종목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2023년 6월 엘살바도르 세계선수권에 출전한 카노아 선수(왼쪽부터), 카노아 아버지, 송민 한국 서핑 대표팀 감독의 모습. [송민 감독 제공] |
▶“2028년 LA올림픽은 출전 할 것”=한국 서핑의 미래를 책임질 유망주들이 성장하고 있다. ‘서핑 신동’이라 불리는 카노아 희재 팔미아노(17)가 대표적이다. 한국인 어머니와 필리핀계 캐나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카노아는 수준급 기량을 선보이며 국내 대회를 석권하고 있다.
카노아를 비롯한 국내 유망주들이 올림픽 무대에 서기 위해선 프로 서핑 리그나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출전권을 따내야한다. 아쉽게도 송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은 올해 2월 말 열린 ‘2024 국제서핑협회(ISA) 세계션수권대회’ 숏보드 단체전에서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당시 한국은 남자 선수(카노아·양진혁·임수현) 3명, 여자 선수(이나라·서재희·홍수옥) 3명 등 총 6명이 경기에 참가했다. 단체전에서 각각 상위 5위, 7위 안에 들어야만 올림픽에 나설 수 있는데 한국은 남자부 37위, 여자부 30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전년도 대회 때보다 성적은 올라갔다. 1년여 만에 10위 이상 뛰어오른 전체 순위 34위를 기록해 역대 최고 성적을 냈다. 송 감독은 한국 선수들의 빠른 발전 속도를 바탕으로 이후 대회에 출전해 한국도 서핑을 잘 할 수 있음을 세계에 증명해내고 싶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2026 일본 나고야-아이치 아시안게임이다. 송 감독은 “우선 아시아권에서 가능성을 만들고 싶다. 그런 다음 2년을 또 열심히 준비해 2028 LA 올림픽에 출전, 좋은 성적을 내는 게 팀과 나의 바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