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지혜…‘팔만대장경’ 숨쉬는 합천 해인사 [정용식의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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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해인사 전경

“홍길동이 합천 해인사 털어먹듯”이라는 속담이 있다. 무엇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싹싹 쓸어가거나 음식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먹는 모양을 빗대어 이른 말이다.

임꺽정,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이라는 ‘홍길동’을 모티브로 한 허균의 소설에서 홍길동이 도적이 돼 최초의 약탈 사건으로 해인사 재물을 탈취할 계획을 세운다. 해인사에 가서 자신을 홍판서댁 자제라고 속이고 음식 대접을 받는 자리에서 몰래 모래를 입안에 넣은 다음 큰 소리로 깨물어 소동을 일으켰다. 그런 다음 음식을 부정하게 만들었다고 트집 잡아 절에 있던 중들을 모두 묶어놓고 부하들 수백 명이 달려들어 모든 재물을 말끔하게 빼앗아 갔다.

해인사 일주문

의적이라는 홍길동이 왜 해인사를 털었을까. 아마도 해인사가 논과 밭 등 큰 땅을 소유해 마을 주민들에게 세를 받고 빌려주는 대지주 같아서 곱지 않은 시선이 있지 않았을까.

후삼국 시대 전란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해인사 일주문 밖에 세운 길상탑(보물)에서 발견된 글에 따르면 후삼국 시대 도적들이 해인사를 습격해 56명이 죽기도 했다.

해인사 표지석

해인사의 가마솥은 엄청나게 커서 그 솥에 팥죽을 끓였는데, 몇 사람이 거기다 배를 놓고 노를 저어 갔다고 하는 동화 속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굉장히 큰 구리 가마솥이 있는 부자 절이었다 하니 바람 잘 날 없었을 해인사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매우 큰 절이다.

해인사 전경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시 세 번이나 해인사를 찾을 정도로 인연이 깊어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당시 승려 300여명이 하안거를 깨고 봉하마을 빈소를 찾았다 한다. 2022년 12월 월드컵 특집으로 SBS 예능 프로그램 ‘미운우리새끼’ 출연진들이 사찰에서 스님들과 족구 시합을 했던 그 곳, 합천 가야산 높은 산자락에 안겨 있는 해인사로 간다.

세계문화 유산 팔만대장경과 법보사찰
해인사 해탈문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1430m)을 뒷 배경으로, 앞에는 매화산(954m)을 바라보고 있는 명당자리 해인사는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며 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대한민국의 국보이자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어 법보(法寶)사찰로 불린다.

해인사 대적광전 앞 정중탑

불교에서 3보(三寶)라 하는 불(佛), 법(法), 승(僧)의 상징 사찰로 불보(진신사리)사찰 통도사와, 승보(수계사찰) 사찰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사찰 중 하나이다.

해인사 석등

팔만대장경은 석가모니가 설법한 경전, 이론서 등을 집대성한 불교경전의 총서인데 인간에게는 8만4000 번뇌가 있어 8만4000 법문을 실었다고 한다. 해인사 대장경판은 불경 6569권 분량의 8만1352판이 있고 이를 땅에서부터 쌓아 올리면 3200m로 백두산보다 높다.

몽골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했던 고려 무신 정권이 불교를 회유해 국난 극복에 동참시키기 위해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1236년부터 15년에 걸쳐 간행한 것이 팔만대장경이다.

해인사 종각, 청화당

강화도 선원사(현 선원사지터)에 보관하고 있었던 대장경판을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 이성계가 1398년 해인사에 장경판전을 짓고 옮겼다. 신라 시대에 창건한 해인사에 고려 시대에 편찬한 팔만대장경을 조선 시대에 장경판전을 지어 보관하게 된 것이다.

장경판전 남쪽 건물인 수다라장

해인사는 고려실록과 조선왕조실록을 수도(首都)이외에 사본을 보험용으로 보관해 두는 곳이어서 고려 시대 이후 중요한 사찰이었다.

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장경각)도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건물로 평가돼 국보 및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팔만대장경을 보관 중인 곳은 엄격하게 막고 있어 외부에서 육안으로만 관람 가능하다.

장경판전 마당

장경각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정신을 대변해 주는 건물로서 고려 대장경판을 봉안해 둔 앞, 뒤 2개의 판전으로서, 각각 ‘수다라장’과 ‘법보전’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장경판전 북쪽 건물인 법보전
장경각 창을 통해 보이는 내부 모습

장격각은 원활한 통풍을 위해 건물 앞뒤와 위 아래에 위치한 창의 크기를 달리했고, 소금·황토 등으로 바닥을 다져 습도 조절을 했다. 대장경판도 보관 시 각각 통풍이 될 수 있도록 제작됐다고 하니 그 오랜 세월 버티게 한 선인들의 기술과 지혜가 엿보인다.

장경각 대장경판

법보전 중간 조그만 기도처에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해인사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는 ‘대장경 테마파크’가 있다. 천년을 이어 온 대장경의 역사적, 문명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대장경 조판 이전부터 경전의 전래와 결집, 천년을 이어왔던 장경판전의 숨겨진 과학에 이르는 역사의 과정을 살펴보고 감상할 수 있으니 둘러볼 만하다.

해인총림, 화엄의 대도량 해인사
해인사 전경

해인사의 해인(海印)은 ‘화엄경’ 중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사상을 천명하고자 창건한 화엄의 대도량이다.

신라시대 의상 대사가 화엄사상을 정립하고 ‘해인삼매론’을 논술했다. 화엄사상은 화엄경을 기반으로 그 핵심은 인간과 자연, 그리고 모든 존재간의 상호 의존성과 상호 연결성을 강조해 인간은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해인사 전경

‘해인삼매’란 번뇌와 망상을 뜻하는 거친 파도의 바다(海)가 잔잔해져 우주의 갖가지 모습이 도장 찍듯(印) 있는 그대로 비쳐 잡념을 벗고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경지(三昧)를 뜻한다. 화엄사상은 통일국가의 상징으로도 활용돼 전제 왕권 국가 체제를 뒷받침하는 호국불교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승려 순응과 이정이 창건했는데 순응은 의상대사의 법손(法孫)으로서, 화엄의 철학,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해인삼매에 근거를 둬 해인사라 명명했다. 의상의 ‘화엄 10찰(신라시대 의상 화엄사상을 전파한 10곳의 사찰)’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이며 해인총림으로 종합 수도도량이다.

해인사 창건 전설

승려 순응(順應)이 766년 당나라로 가서 깨우침을 얻던 중 보지공(寶誌公, 418~514)화상의 제자를 만나 보지공의 묘소에서 7일간 법(法)을 구했는데, 그때 보지공이 나와 설법하고 우두산(牛頭山, 1046m 해인산 북쪽 거창에 있는 산) 서쪽 기슭에 절을 세우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 후 귀국한 순응은 가야산에 들어가 사냥꾼의 도움으로 현재 해인사 자리에 암자를 짓고 그곳에서 지냈다. 그때 애장왕의 왕후가 등창병으로 고생하는데 어떠한 약도 효력이 없어 가야산 순응의 소식을 듣고 도움을 청했다.

순응은 오색실을 주면서 실의 한쪽 끝을 배나무에 매고 다른 한쪽 끝을 아픈 곳에 대면 나을 것이라고 해 그대로 시행했더니 왕후의 병이 나았다. 이에 왕은 순응이 해인사를 지을 때 인부를 동원해 일을 도왔다고 한다. 대가야 왕족의 후예라고 하는 승려 순응과 이정이 옛 대가야 영역인 가야산 자락에 신라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원으로 해인사를 창건한 것은 아마도 신라 왕실의 대가야 유민 포용책이었을 것이다. 화엄사상을 통해 통일 국가의 당위성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해인사는 조선시대 불교 탄압기에도 교종(敎宗) 18개 사찰 중의 하나로 전답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1900년 초 영남 중법산(中法山)으로 수(首)사찰이 됐고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됐다. 현재는 172개 말사와 부속 암자 16개를 거느리고 있는 법보 종찰이며, 선원(禪院)·강원(講院)·율원(律院) 등을 갖춘 총림(叢林)으로서 큰 맥을 이루고 있다.

해인사 봉황문

해인사는 절 자체가 사적지이며 명승지이다. 대장경판(大藏經板) 장경판전(藏經板殿) 등 국보 6점과 법보전, 대적광전,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길상탑(吉祥塔), 동종(銅鍾), 홍제암(弘濟庵), 홍하문(紅霞門) 등 보물 21점, 그리고 30여개 유형문화재 등을 보유하고 있다.

일주문에서 사천왕상 채색작업이 한창인 봉황문 가는 길에는 ‘소금의 기운으로 화재를 막는다’는 소금단지가 있다. 해인사는 화재로 인해 7차례 중수했으나 신기하게도 장경판전은 화마를 피해 갔다. 화재가 많이 일어나다 보니 바닷물로 불길을 잡겠다며 해마다 단옷날이 오면 소금을 단지에 담아 묻는 행사를 한다.

해인사 소원나무(은행나무)
소원나무에 기원 글이 달려 있는 모습

봉황문을 지나 기원 글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소원나무(은행나무)가 국사단 앞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창건 시 가야산 산신령이 점지해준 산신(山神)이 깃든 곳이라 한다. 해탈문을 지나 부처님의 지혜가 아홉 줄기처럼 뻗어나간다는 구광루 앞마당에는 최근에 조성한 해인도(海印圖)가 있다. 화엄경의 가르침을 마당에 도상(圖上)으로 형상화해 한 바퀴를 합장하고 돌면 지혜와 복덕을 얻는다고 하니 필자도 무심하게 한 바퀴를 돌아본다. 마당 한 편엔 설법하는 보경당과 종각, 접견실인 청화당(淸和堂) 등이 있다.

학사대로 가는 길

구광루를 지나 비로소 수행 및 예불 공간이 펼쳐지니 비로탑(삼층석탑)과 석등이 마당의 중심을 지키고 궁현당과 관음전이 있다. 높은 축대 위에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 있고 그 좌측에 가장 오래된 목조 비로자나불이 있는 대비로전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을 만나게 된다. 대적광전 앞 신용카드, 페이로도 지불할 수 있는 디지털 불전함을 보며 변화도 느끼지만 아직은 생경스럽다.

학사대

장경판전을 뒤로하고 내려오다 보니 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 선생이 말년을 보내고 집필에 몰두했던 장소라는 학사대(學士臺)가 있고, 최치원이 꽃아 둔 지팡이는 나무가 돼 천연기념물이 됐다. 안타깝게 태풍으로 부러져 지금은 참배객을 위한 의자로 재활용되고 있다.

오랜 역사를 지켜온 사람들
해인도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라는 산문을 지나고 들어가다 보니 입구에 20여기의 비석이 있는 비석거리에 성철(1912~1993년) 스님 행적비와 해인사를 크게 일으킨 자운(1911~1992년), 혜암(1920~2001년), 일타(1929~1999년) 스님의 행적비와 사리탑이 있다. 일주문 가까이 가니 고려 인종 때 세운 고려 시대의 고승 원경왕사(1045~1114) 비도 자리하고 있다. 해인사에는 그만큼 해인사를 지키고 키워온 고승 대덕들이 많다.

해인사에 머물렀다는 대각국사 의천과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1610년 해인사에서 세상을 떠난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있었다. 근래 와서는 독립운동가로 해인사에 머무르며 자운, 성철 등 수많은 선승들을 제자로 배출한 백용성 스님도 있다.

대적광전

해인총림 초대 방장이며 조계종 6,7대 종정을 지냈으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문으로 우리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성철 스님은 해인사 깊은 산중인 백련암에 머무르며 자신을 만나려면 3000배를 꼭 해야 한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백련암은 고지가 꽤 높아 전망이 좋은 곳으로, 성철스님이 입적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재가 신도들이 매달 셋째 주 3000배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백련암 올라가는 초입에는 성철 스님 사리탑이 넓게 조성돼 있다. 한국불교사의 큰 스님이요, 해인사의 자부심인 듯 하다.

대적광전

해인사는 6·25 전쟁 때 빨치산 기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미군에 의해 폭격 대상으로 지정됐으나 김영환 장군(1921~1954년) 등이 명령을 거부해 폭격을 피했다. 해인사와 대장경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기에 김영환 장군의 공적비를 세우고 기리는 추모제를 열고 있다.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대적광전 좌측의 대비로전(大毘盧殿)에 봉안된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불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화재에 대비해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단 지하에 공간을 마련해 화재 발생 시 지하로 대피시킬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무진장 큰 가마솥이 있다는 해인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말사를 거느린 대형 사찰로 사명대사, 용성선사, 성철스님, 그리고 김영환 장군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해인사가 도적들의 표적이 아닌 큰 사찰로서 불교 중흥과 국가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기대해본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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