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랑데부' [옐로밤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는 나에게 우주에 대해 알려줬다. 그녀는 나에게 영혼에 대해 알려줬다.”
자석의 N과 S극처럼 정반대에 있는 두 남녀.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선다. 강박장애를 겪는 남자 태섭과 아픈 과거를 짊어진 지희는 닿을 수 없을 것 같던 거리를 좁혀 서로의 앞까지 다다른다. 상대를 향해 뻗은 손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 당긴다. 끌림은 결국 사랑이 된다.
중년의 ‘사랑 이야기’가 시작된다. 90분의 무대를 가득 채우는 건 두 배우의 숨과 눈빛, 몸짓 그리고 대사다. 연극 ‘랑데부’(8월 24일 개막, LG아트센터 U+ 스테이지)는 서로 다른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서로의 무게를 덜어내며 나누게 된 사랑을 그린다. 배우 박성웅·최원영·문정희·박효주가 출연한다.
작품의 원안자는 문정희다. 그가 살사를 추면서 겪은 경험담이 작품에 담겼다. 문정희는 지난 7일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옐로밤에서 열린 오픈 리허설에서 “살사를 추면서 만난 친구 중에 로켓을 연구한 과학자를 알게 됐다. 그 친구가 춤을 수학적으로 배우면서 재미를 느낀다고 이야기한 것에 영감을 받아 시놉시스가 시작됐다”며 “시나리오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김정한 연출이 연극으로 해보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두 배우는 단 한 번의 퇴장도 없이 무대 위에 존재한다. 무대가 독특하다. 대형 트레드밀 런웨이를 설치한 무대가 실험적이다.
최원영은 “새로운 형식의 무대와 생소한 장치가 무대에서 펼쳐진다는 것이 신선하다고 느껴졌는데, 막상 연습을 해보니 직렬 방식의 런웨이 무대에 당황을 많이 했다”며 “연극 무대는 배우들에게 연기의 근간이 되는 공간이다. 로맨스를 중심으로 삶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연극 '랑데부' 박성웅 문정희 [옐로밤 제공] |
이 무대를 통해 박성웅은 24년 만에 연극 복귀를 앞두고 있다. 영화 ‘신세계’, 넷플릭스 드라마 ‘사냥개들’ 등 강렬한 캐릭터를 도맡아 온 박성웅은 이 연극을 통해 일상의 얼굴를 가져온다. 박성웅은 “그동안 건달과 같은 센 이미지의 배우로 보여졌는데, 나를 제대로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동해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박성웅이 이 작품에 함께 하기까진 김정한 연출가의 성의있는 설득이 있었다. 김 연출가는 “박성웅은 폭력적인 콘텐츠에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 중 1등이라고 할 수 있다”며 “아기가 태어날 때 우는 것과 같은 원초적이고 직선적인 에너지인 만큼 무대에 잘 어울릴 거라 봤다”고 했다. 어린 아이 같은 에너지를 내는 사람이라면 분명 엄청나게 순수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게 김 연출가의 판단이었다.
호기롭게 무대 복귀를 선언했지만 박성웅은 “연습을 시작한 뒤로 김 감독에게 계속 욕을 했다”고 했다. 실험적인 작품이다 보니 대본을 읽을 때부터 이미 쉽지 않을 것을 예상했지만, 무대를 에워싼 4개 면이 모두 객석인 만큼 연기로만 채우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이 컸다. 그는 “같은 배역으로 더블 캐스팅된 최원영의 연기 연습을 보면서 많이 배운다”면서 “어벤져스 급으로 꾸려진 출연 배우들과 서로 감동을 받으며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효주도 “새로운 장치들이 (내게) 도전이 됐다”며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은 있지만, 발전의 계기가 되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연극 '랑데부' [옐로밤 제공] |
개막일이 가까워질수록 배우들의 자신감도 커졌다. 문정희는 “머릿속에 갖고 있던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연출님이 주신 책이 재밌었다”며 “퇴장 없이 우리의 연기로 (무대를) 채워야 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관객과 호흡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우들과 가깝게 교감하며 공연한 지 20년이 됐는데 ‘참 연기가 맛있다’는 느낌이 든다. 배우들의 매력이 무대에서 잘 드러날 것 같다”고 했다.
박성웅 역시 “배우들이 자긍심과 만족감, 성취감을 크게 느끼면서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관객이 단 한 명뿐이더라도 총력을 다해 연기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 “공연을 끝내면 재연을 기다리는 관객이 많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그간 대표작을 ‘신세계’, ‘태왕사신기’라고 했는데 이젠 ‘랑데부’라고 할 수 있게 됐다”며 “매일 연습하면서 힘들다 느끼지만 배우로서 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다”고 했다.
다만 아직 완전히 풀지 못한 숙제가 하나 있다. 연극의 마지막 대사다. ‘미안해, 전부 다 내 잘못이야’. 이 짧고 평범한 한 줄 때문에 박성웅은 고심이 깊다. 그는 “대사 뒤에 곧바로 즉흥적인 춤 장면이 이어지는데,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다”면서 “공연이 끝나도 머릿속에 계속 남아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공연은 다음 달 2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