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피아니스트 율리우스 아살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자신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쳤다. 무려 6곡이나 쏟아진 앙코르에 한국 관객도 완전히 매료됐다. [예술의전당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마드리갈’·‘기사들의 춤’, 브람스, 스카를라티…. 네 번의 앙코르를 마치고 다시 무대로 나온 율리우스 아살(27)은 잠시 망설이나 싶더니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조금만 해보겠다’는 손 제스처가 나오자 객석은 다시 박수가 나왔다. 즉흥으로 이어진 다섯 번째 앙코르가 끝나갈 무렵 그는 관객들과 눈을 맞추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이 곡을 마무리하겠다는 신호였다.
객석엔 말랑해진 온기가 내려앉았다. 미소년의 외모에 관객 조련 능력까지 갖춘 ‘피아노 아이돌’의 첫 한국 리사이틀은 성공적이었다. 관객의 마음을 모조리 훔쳐간 시간이었다. 다섯 번의 앙코르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는 무려 여섯 곡의 앙코르를 들려준 뒤에야 무대를 떠났다.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독일 출신의 피아니스트 율리우스 아살은 “시차의 영향을 받지 않아 한국에 오자마자 즐겁게 보냈다”고 했다.
첫 한국 리사이틀을 위한 일정은 촉박했지만, 알차게 이어졌다. 베를린에서 날아오자마자 우선 ‘한국인 절친’부터 만났다. 한스 아이슬러 음악 아카데미에서 만난 바이올리니스트 박수예(24)다. 그는 “수예는 베를린에서 가장 친한 친구”라며 “수예의 소개로 피아니스트 박재홍(25)과 셋이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절친’ 박수예가 소개한 박재홍과는 ‘피아노 거장’ 안드라스 쉬프라는 연결 고리가 있다. 아살은 쉬프의 제자이고, 박재홍은 2022년 쉬프의 한국 콘서트에서 통역을 맡았다. 올 가을부턴 쉬프에게 배우기 위해 베를린으로 떠난다.
독일 피아니스트 율리우스 아살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 자신의 음악세계를 마음껏 펼쳤다. 무려 6곡이나 쏟아진 앙코르에 한국 관객도 완전히 매료됐다. [예술의전당 제공] |
그의 이번 리사이틀의 구성은 독특했다. 무려 55분간 스크랴빈과 스카를라티, 아살의 즉흥곡이 한 곡처럼 이어지며 1부를 마쳤다. 2부엔 브람스 소나타 한 곡을 배치했다. “낭만 작품 중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5악장으로 구성된 특이한 구조의 곡”이라고 했다. 1부와 2부의 대조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구성이었다. 특히 공연의 1부는 아살이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발탁된 뒤 발매한 첫 앨범 ‘스크랴빈, 스카를라티’ 음반의 수록곡으로 했다.
“사실 이번 공연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 어려움이 있었어요. 앨범을 기획할 때 모든 곡들이 잘 어우러져 이어질 수 있도록 배치했기에 그 중 일부를 (가져와) 프로그램으로 짜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아살은 뛰어난 큐레이터다. 콩쿠르 이력 한 줄 없는 아살을 DG가 발굴, 발탁한 것도 이러한 재능 때문이다. 음악 애호가들이 만든 플레이리스트가 각광받는 시대에 최적화된 클래식 아티스트라고 평가해서다. 그는 지난해 DG의 옐로우 라운지에 대타로 나와 드뷔시를 재창조한 연주를 들려준 인연으로 DG와 계약을 하게 됐다. 당시 프랑스 ‘르 몽드’는 아살의 연주를 “매혹적인 독창성을 담은 비밀스럽고 섬세한 조화”라고 극찬했다. 현재 그는 동세대에서 가장 촉망받는 연주자 중 한 명으로 두각을 보이고 있다.
첫 음반에선 총 74분 분량으로 두 작곡가를 연결했다. 스크랴빈 소나타 1번을 시작으로 스크랴빈과 스카를라티를 긴밀하게 엮는다. 공연은 21개 트랙을 담은 음반에서 발췌해 55분 분량의 프로그램으로 구성했다. 사실 19세기 말의 러시아 작곡가 스크랴빈과 17세기 말~18세기 중반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작곡가 스카를라티를 엮는 발상부터가 독창적이다.
콩쿠르 이력 한 번 없이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의 선택을 받은 율리우스 아살 [유니버설뮤직 제공] |
아살 역시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작곡가라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는 “스카를라티는 챔발로를 위한 곡을 200곡이나 작곡했고, 소리를 시각·후각으로도 감각하길 바란 작곡가였다”고 설명했다.
“스크랴빈과 스카를라티는 그들의 언어, 시간, 나라, 스타일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이 둘을 결합하면서 이전엔 존재하지 않은 음악의 방에서 서로를 만나게 했다는 의미가 있어요. 그들이 함께 하는 여정에 적합한 곡을 찾아 만들어가는 것이 제겐 매우 개인적이지만, 재밌는 일이었어요.”
러시아 작곡가의 레퍼토리를 잘 다루지 않는 헝가리 출신의 거장 쉬프는 제자의 첫 DG 음반에 색다른 평가를 들려줬다고 한다. 아살은 “베토벤, 하이든, 슈베르트, 바흐, 모차르트를 주로 연주하는 선생님께선 두 작곡가를 연결한다는 것에 흥미로워 했다”며 “특히 스카를라티를 연주할 땐 어떻게 하면 매번 다르게 연주할 수 있는 지에 대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줬다”고 했다.
“선생님껜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전 선생님이 가진 다양한 가치들을 굉장히 존경하는데요. 음악에 대해 느끼는 것, 소통하는 법,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늘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있어요.”
아살의 한국 공연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특출난 재능’을 가진 신성 피아니스트의 창의성과 음악성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공연의 시작은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1번의 4악장 중 ‘거의 아무 것도 없이’였다. 건반 위로 밀도 높은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며 단단한 파동을 만들었다. 꿈결 속을 거닐듯 아름다운 음색이 이어졌고, 모든 곡이 F마이너를 관통하며 여러 개의 곡들을 매끄럽게 연결한다. 아살은 “스카를라티의 곡 중에서 조금 덜 명랑하고, 덜 즐거우면서도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하는 곡과 스크랴빈의 초기 작업을 엮었다”고 했다.
콩쿠르 이력 한 번 없이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의 선택을 받은 율리우스 아살 [유니버설뮤직 제공] |
놀랍도록 창의적인 큐레이션의 핵심 장치는 ‘같은 조성’이다. 전혀 다른 시대의 두 작곡가를 만나게 할 연결고리를 조성으로 찾은 것이다. 그러자 각기 다른 곡들은 길고 장대한 하나의 곡으로 이어졌다. 후기 낭만 시대에서 바로크로, 현대로 이어졌다. 긴 흐름을 만들기 위해 아살은 자신의 곡을 ‘전환’ 삼아 배치했다. 전조를 위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다. B플랫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다시 스크랴빈 전주에서 스카를라티 소나타로, E플랫의 스크랴빈에서 아살의 곡으로 전환을 이룬 뒤 다시 스크랴빈의 소나타 1번 4악장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55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는 “몇 백 년, 몇 천 년 전에 각기 다른 음악을 작곡한 두 사람이 있었다. 아주 많은 시간이 지나 이토록 다른 음악을 현대의 공간에서 연주하며 새로운 맥락과 상황을 만드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봤다”며 “어쩌면 100년 후엔 또 다른 컨텍스트가 주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둘의 음악을 연결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아살은 미처 몰랐던 위대한 작곡가들의 걸작을 발굴해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재창조해 또 다른 음악세계를 보여준다.
“피아니스트는 관객에게 그들이 살지 않았던 시대에 존재했던 작곡가들의 천재성을 전달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연주자의 비전과 방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메시지예요. 여기에 저의 정체성과 성향을 연결해 둘 사이의 균형을 찾으려 하죠. 클래식은 여전히 유효하고, 우리가 죽은 뒤에도 유효할 것이라는 점을 꾸준히 전달하려고 해요.”